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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지 게시판의 "불심을 품은 섬 가사도(加沙島)" 내용입니다.
제목 불심을 품은 섬 가사도(加沙島)
작성일 2020-06-17 16:29:44 (최종수정일 : 2020-06-17 16:33:59), 관리자 조회수 6 회

불심을 품은 섬 가사도(加沙島) 게시물의 첨부파일 : 가사도 항공사진.png

가사도는?
 
가사도(加沙島)는 진도군 조도면 가사도리에 속한 섬이다. 총인구 294명, 163세대, 총면적 5,559㎢, 해안선 21.77㎞이다. 공공기관으로 조도면 가사도 출장소, 가사도 치안센터, 가사도 보건진료, 목포지방항만청 가사도항로표지관리소(가사도 등대)가 있고 교육기관으로 진도서초등학교 가사도분교가 있다. 가사, 궁항, 돌목의 자연마을이 있으며 톳, 돌미역, 전복 등의 특산물을 생산한다. 가사도, 주지도, 양덕도, 혈도, 송도, 광도, 외공도, 가덕도 등의 섬으로 이루어진 가사군도를 형성하고 있다.
 

가사도 역사

 가사도는 1600년대에 해남 우수영에서 인동 장씨가 들어오면서 마을이 형성되었고 진도군 제도면에 속했던 섬이지만 1896년 가사면으로 독립했다. 이때 가사면의 관할리는 가사도, 저도, 율도, 마진도, 평사도, 고사도 6개리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해 가사면은 평사리와 고사리를 병합하여 ‘가사도리’라 하여 다시 조도면에 편입되었으며, 이때 가사면에 속했던 마진도, 율목도, 저도를 합하여 ‘마진도리’라 하였다. 1964년 군조례 제 87호에 의해 가사도에 조도면 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65년 2월 가사리에서 궁항과 돌목이 가사2구로 독립하였으나 가사2구로 독립했던 궁항과 돌목이 1970년 1월 다시 2구(궁항), 3구(돌목)로 분리되었다. 1983년 2월 대통령령에 의해 가사도리에 속해 있던 고사, 평사, 마진도, 율도가 신안군 신의면에 편입되었다. 현재 가사도리에 속한 유인도서는 가사도, 주지도(손가락섬), 양덕도(발가락섬), 혈도, 송도, 광도(사자섬)이며, 가사도는 가사, 궁항, 돌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록에 가사도는 ‘加士’, ‘加西’, ‘袈裟’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데, 1750년대 초에 제작된 『해동지도(海東地圖)』에는 ‘加士島’로 표기되어 있으며 육지와 연결되어 있고 1872년에 제작된 『진도부지도(珍島府地圖)』에는 ‘加士’로 표기되고 섬으로 그려져 있다.

    
해동지도의 가사도(오른쪽)                                              진도부지도의 가사도

가사도의 마을
 
가사(加沙) 마을

1600년대에 해남 우수영에서 인동 장씨 장태산이 들어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진도 임회면에 거주하던 장성원이 하촌에 들어와 정착하였다. 섬의 모양이 가세(가위)처럼 생겨 ‘가세섬’으로 불리다가 불교의 영향을 받아 중의 옷을 뜻하는 ‘가사’로 개칭되었다. 가사도는 ‘加士’, ‘加西’, ‘袈裟’ 등 여러 이름으로 기록되고 있다. 가사도의 관공서와 학교, 의료시설 등이 모여 있는 가사도 중심 마을이다.
 
궁항(弓項) 마을

가사도의 동쪽에 위치한 바닷가마을이다. 원래 가사리에 속했지만 1965년 돌목과 합해 가사2구로 독립했다. 궁항마을은 지산면 길은에 거주하던 경주 이씨 이대호(李大浩, 1791~?)가 이 섬에 살던 장덕영(張德榮)의 사위가 되어 들어와 정착하면서 형성되었다. ‘궁항(弓項)’은 마을이 활의 목에 해당하는 곳에 위치한다 하여 붙여진 명칭으로, ‘활목’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돌목(突目) 마을

가사도의 서남쪽에 위치한 바닷가마을이다. 원래 가사리에 속했지만 1965년 궁항과 합해 가사2구가 되었으며, 이후 1970년 궁항에서 독립하여 가사3구가 되었다. 돌목마을은 가사도 세 개의 마을 중 가장 작은 마을이지만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옥돌광산일을 시작하면서 가사도의 다른 큰 동네보다 더 붐비기도 했다. 마을에 가장 오래 전부터 살았던 성씨는 경주 이씨이며, 박씨, 김씨, 문씨, 정씨, 임씨 순으로 많이 거주하고 있다.
 
가사도의 전설
 
불심이 깃든 가사군도 전설

진도군 지산면 지력산 남쪽 산자락에 있던 절 동백사에서 수도하던 노스님이 산 정상에서 수평선 너머 은빛 석양노을과 새떼가 어우러진 풍경을 바라보다가 도취되어 법의를 입은 채 바다의 새떼를 쫓아 헤엄쳐가던 중 벼락을 맞아 죽었다. 스님의 가사는 가사도 섬으로, 장삼은 장산도로, 하의는 하의도, 상의는 상태도, 스님의 불심은 불도의 불탑바위로, 자비스런 마음은 보리섬(교맥도)으로 변했다는 전설과 함께 섬들의 이름이 전해진다. 신들이 모여 산다는 신도, 예불시간이면 북소리가 울린다는 북송도, 관세음보살이 계신다는 우이도, 관음산과 주변에 주지도, 양덕도, 새섬 광대도(사자섬), 방구섬, 밤섬, 소동섬, 닥섬과 혈도, 마진도, 백야도 등 신비스런 전설의 섬 무리를 이루고 있다. 가사군도는 중이 가사를 입고 염불하는 형이라 하고 이름처럼 불교적 색채를 많이 띄는 섬으로, 살생을 금하는 불교적 전설도 전해진다. 가사도 근해에는 조기를 주로 하는 풍부한 어장이나 살생을 금하여 보고(寶庫)를 두고도 고기를 잡지 않았다고 전한다.
 
왕을 잉태한다는 가사도 사람

가사도는 풍수지리적으로 큰 스님이 입는 가사이면서 동시에 섬 그대로 지체 높은 도승의 형국이다. 그래서 전설에 의하면 ‘가사도 섬에서 태어난 사람의 몸에서 왕을 낳는다’고 한다. 그런데 가사도의 ‘가(袈)’자가 가(加) 밑에 의(衣)자를 붙였기 때문에 남자는 왕이 나오지 않고, 여자를 통하여 왕이 탄생한다고 풀이한다. 즉, 가사도는 여자의 치마폭에서 왕이 탄생하기 때문에 가사도 출신의 남자로부터는 왕이 태어나지 않고, 가사도 출신의 여자로부터 왕이 태어난다는 것이다.
 
거북바위 명당과 자손 발복

마을의 동남쪽 가사도항로표지관리소 아래에 거북바위가 있다. 옛날에 진도에서 낚시를 온 사람이 낚시를 하다가 바위 위에 이상한 불이 켜져 있어 올라가 보니, 양쪽에 암벽이 형성되어 있고 중심부분에 흙이 있었다. 주변이 마치 거북이가 밖으로 나가는 혈도처럼 보여 명당으로 생각하고 부친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했다. 그 후 후손들이 7대에 이르기까지 번창하고 벼슬에 올랐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등대를 세우면서 이곳을 폭파하는 바람에 묘가 움직여 7명의 자식들이 급사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 세력이 남아 집안의 가세가 좋다고 전해져온다.
 
처녀강 전설

진도 주지도의 한 청년이 가사도 어여쁜 여인에게 반하여 매일밤 섬을 헤엄쳐 여자를 만났다. 그러던 중 그 여인은 임신을 하게 되었고 청년은 그 사실이 알려질가 두려워 그 여인을 만나러 가지 않았다. 여인은 매일 그 청년을 그리워하며 노승봉 정상에 올랐고 기다리다 지쳐 내려오던 도중 연못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청년은 괴로워하며 가사도 십자동굴의 입구를 막고 죄를 뉘우쳤다고 한다. 처녀가 목숨을 끊은 연못은 처녀강이라고 전해지며 십자동굴 벽면에는 처녀의 형상이 나타나기도 한다고 전해진다.
 
가사도의 주요 사건
 
일제의 광물 수탈

 가사도에는 일제강점기 광물 수탈의 흔적인 폐광이 남아 있다. 『동아일보』 1933년 12월 19일자 기사에 「兵器材料(병기재료)의輕金屬(경금속)이 全南地方(전남지방)에無盡藏(무진장)」이라는 기사를 통해 가사도 광산개발을 결정했다는 보도를 하였다. 주요 내용으로는 ‘朝鮮窒素(조선질소)도 전남 진도의 가사도광산에서 “알루미나”와 가리비료유산(加里肥料硫酸) 등을 제조하기로 결정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아일보』 1934년 5월 5일자 기사에 「輕金屬資源(경금속자원)」이라는 제목으로 조선의 경금속 자원에 대해 보도하고 있는데 明礬石(명반석) 매장량 설명에서 전남 해남군 문내면의 옥매산 광상이 가장 풍부하고 그다음이 가사도라 하였다.
또한 『동아일보』 1934년 5월 29일자 기사에 「조선에서는 平壤無煙炭田(평양무연탄전)에 다량의 礬土頁岩(반토혈암)이 존재되고 明礬石(명반석)은 전남 玉埋山及加沙島方面(옥매산급가사도방면)에 큰 鑛床(광상)이 存(존)한바 후자는 반출에도 편리하고 알미늄 원광으로서는 가장 유망한 것이며 住友及(주우급) 日本電氣(일본전기) 공업 등의 알미늄사업은 이것을 원료로 계획되어있다」고 하여 수탈의 편리성과 광물소비계획을 말하고 있다. 『동아일보』 1935년 2월 5일자 「朝鮮(조선)의 新興工業(신흥공업) 現狀(현상)과 그展望(전망) (下(하))」기사에도 같은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가사도 명반석 광산은 계속 채취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황금어장을 망친 천지호 침몰

1968년 5월 17일 7천 톤의 벙커시유를 실은 천지호(5,242톤)가 전남 진도군 조도면 병풍도에서 침몰하였다. 파열된 1,000톤들이 탱크 2개에서 흘러나온 기름으로 인근 해초와 어류가 멸종되다시피 하여 1968년 7월 3일 기준으로 5억4천8백42만원의 피해를 냈다. 이 사고로 맹골도, 동거차도, 서거차도, 관매, 소마, 대마, 진목, 관사, 내눌, 내병, 외병, 성내, 가사, 독거도 등의 해변은 기름으로 덮이게 되었다. 병풍도 근해 섬의 돌김 미역, 톳, 앵초, 청태, 우무가사리 등 해조류는 전멸 상태에 있다. 또 수면에는 기름이 떠 있기 때문에 깊은 바다에 서식하는 고기까지 달아나버렸다.(경향신문 1968년 7월 6일)


 


 
가사도의 민속과 문화유산
 
가사도의 당제

 가사도에서는 매년 마을의 안녕과 평안을 위해 당제를 지냈다. 당제는 매년 10월에 지내다가 언젠가부터 정초에 지내기 시작했고,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그마저도 중단되었다.
 제당은 웃당인 할아버지당과 아랫당인 할머니당으로 구분된다. 웃당은 마을의 앞산 정상에 당집으로 조성하였고, 아랫당은 마을 뒷산의 정상에 석실로 조성되어 있다. 제물로는 소머리나 소다리를 놓았다. 제가 끝난 뒤에는 ‘진턱거리’라고 하는 갯가에서 헌식제를 올렸다. 제사 비용은 마을의 해조류 채취어장의 수익으로 충당하였다. 가사도에서는 해조류 채취구역을 ‘해안수’라고 하는데, 이 해안수 일부를 위탁 임대하여 그 수익으로 제관의 수고비와 제물 비용을 마련하였다.
당제의 마지막 헌식을 하면서 바다에 바가지 띄배를 띄워보냈다. 이때 액을 실어 보내는 노래를 부르는데 노래 사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병과 잡귀 몰아내고 님과 복을 쳐들이자
  중자꿍짜 자자꿍꿍짜 자자꿍 꿍자꿍자
  갈라문 가고 말라문 말고 조도로 갈라문 가고
  진도로 갈라문 가고 느그 알아서 떠나거라

    

가사도의 초분

 가사도에는 초분을 행하는 관행이 최근까지 이어졌다. 초분은 지방에 따라 초빈, 외빈, 초장, 구토릉 등으로 불린다. 사람이 죽으면 바로 땅에 매장하지 않고 관을 땅 위에 놓고 이엉으로 덮어서 묘를 만드는 장례방식이다. 초분이라는 이름도 관을 풀이나 짚으로 덮어 만든 무덤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으로 추정한다. 일반적인 유교식 장례가 단 한 번의 매장으로 끝나는 단장제(單葬制)임에 비하여, 시신이 썩은 후 뼈를 골라내어 다시 매장한다고 하여 복장제(復葬制)라고 한다. 가사도에서는 2012년까지 초분이 존재했다.


 
 
가사도 등대

 부산, 제주↔인천, 목포 방면으로 항해하는 선박의 안전을 위해 광력증강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1984년 10월 유인등대로 새롭게 태어나 서남해역 교통로의 이정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등탑은 평균 해수면으로부터 70m에 이르는 고지대에 위치하며, 프리즘렌즈 회전식 등명기의 불빛은 50km에 이르고 있다. 지역적으로 짙은 안개가 자주 발생되어 통항선박의 안전항해를 유도하기 위하여 음향신호인 무신호기를 작동하여 음산한 해무와 연중 승부를 겨루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인근의 하조도등대가 장죽수도를 관장하는 이정표라면 가사도등대는 목포의 내외항의 교차로에서 지정학적으로 해상교통 경찰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 등대는 1915년 10월 처음 점등됐으며, 높이 12m의 백원형콘크리트로 이루어져 있다.
 
가사도의 현재와 미래
 
가사도는 조도면에 속한 해역들 중 유일하게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지구에서 제외된 곳이다. 가사도는 농어업이 발달했으며, 조도해역에서 톳 양식이 가장 많다. 가사도의 톳은 품질이 좋아 전량 일본으로 수출하였으나, 양식톳이 생산되어 가격이 하락함에 따라 국내에서도 유통, 판매되고 있다. 주 어획 어종으로 숭어, 우럭, 붕장어가 있고, 전복, 톳, 미역, 참모자반 등의 해산물이 자란다. 농산물로는 쌀, 대파, 홍화씨, 더덕 등을 들 수 있으며, 소와 흑염소의 방목도 이루어진다.
가사도 사람들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저인망 어선으로 고기잡이를 했다. 그러나 어획량이 줄고 모래채취로 인한 어장의 여건이 나빠지자 해조류 양식으로 돌렸다. 젊은 사람들은 더 나은 수익을 올리기 위해 전복을 양식하거나 전복의 먹이인 다시마를 길러 전복양식장의 사료로 완도에 판매하기도 한다.
 가사도는 일제강점기인 1922년에 개발이 착수되어 일본에 수출한 납석 광산이 있던 곳이다. 이때의 납석운반 전용 부두가 섬에 남아있다. 현재는 옥출광산의 소유로 되어 있는데, 1922년 5월 22일자로 납석과 고령토, 명반석 등 광물 채굴광으로 등록을 마쳤다. 이후 1980년 4월에 제주도에 주소를 둔 대양해운이 가사도 해역에 규사광 등록을 했으나 모채 채취업을 하다가 중단하였다. 1998년 서울의 심재열이라는 사람이 가사도에 금과 은이 있다고 세우광산이라는 이름으로 광구등록을 해 여덟 곳에서 시굴을 한 적이 있다. 이 밖에 한국도자기가 규사 채취를 위해 많은 임야를 사들였으나 채굴만 한 바 있다. 2016년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이 신탐사기술로 가사도에서 대규모 금광상을 발견하고 골든썬(주)이 금광개발을 진행 중이다. 하지만 금광개발로 인한 주민들의 피해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 2014년 가사도는 국내 최초로 ‘에너지 자립섬’이 되었다. 에너지 자립섬이란 에너지관리시스템(EMS)을 기반으로 한 마이크로그리드 기술을 적용하여 화석연료를 사용하지 않고 신재생에너지로 상시 전력을 생산해 공급하고 소비하는 섬을 말한다. 가사도에 설치된 신재생에너지는 바람을 이용한 풍력발전과 태양광발전이다. 이로써 가사도 주민들은 전기부족의 걱정에서 해방되었고 친환경적 섬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에너지 자립섬을 바탕으로 친환경적 생태섬 이미지를 관광상품화하기 위해 진도군에서는 11억 5천만원을 들여 가사도에 생태섬 조성사업을 추진하였다. 생태섬 조성사업은 관광안내소 설치, 해안 생태숲길 조성, 해양경관 산책로 조성, 십자동굴 생태탐방로 조성 등 자연 경관을 활용한 탐방로 조성과 안내판 설치가 주를 이룬다. 이렇게 관광객을 유치하고자 많은 돈을 들여 생태섬 조성사업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가사도 방문객이 적은 이유는 무엇보다 교통의 불편함에 있다.

 

 전남 서남부 섬 통행의 주요 관문인 목포항에서 가사도를 운항하는 배편은 하나뿐이고 시간도 대략 4시간이 걸린다. 진도 쉬미항에서 가사도를 운항하는 배편이 있기는 하나 이는 금광 개발회사에서 자재와 화물 등을 운송하는 것이 주 목적이지 승객용이라고 하기엔 어렵다. 2019년 진도군에서는 가사도 급수선 건조 사업비를 전용하여 차도선을 건조한 것이 적발되어 감사원으로부터 보조금 환수조치가 있었다. 이 일은 가사도 주민들의 오랜 숙원을 해결하기 위해 군에서 내린 결정이었겠지만 결과적으로 국토교통부로부터 승인을 받지 않고 예산을 전용하여 보조금 환수조치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가사페리호’라는 이름으로 취항하지 못하고 묶여 있는 배가 하루 빨리 정상 운항을 하여 가사도 주민들의 불편을 해결하고 관광객도 끌어 모을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