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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게시판의 "청백리 삼산 이태중" 내용입니다.
제목 청백리 삼산 이태중
작성일 2020-06-29 14:38:17 (최종수정일 : 2020-07-02 11:06:37), 관리자 조회수 3 회
“나는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이렇게 진도와 얽히는가?”

 삼산 이태중(1694-1756)이, 1750년 3월 26일 진도유배 명을 받고 독백했을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로부터 15년 전인 1735년 홍계유(洪啓裕 1696-1742) 정언은, 흑산도로 유배된 이태중의 사면복직을 건의했다가 오히려 왕의 노여움을 사서 진도에 유배되었다.
 이태중의 흑산도 유배 발단은 신임사화(신축1721-임인1722)로 거스른다. 노론(영조파)을 역모로 몰아 소론(경종파)이 실권을 잡은 왕위계승 당파싸움이었다. 이태중은 당시 노론 4대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신원했다가, 당쟁을 일삼는다 하여 흑산도로 유배된 것이다. 4대신이란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우의정 이건명(李健命), 영중추부사 이이명(李頤命), 판중추부사 조태채(趙泰采)이다. 이들 가운데 영의정 김창집은 아버지 김수항(金壽恒)이 1689년 영의정 당시 진도에 유배당하여 그해 사약을 받아 죽었고, 조태채는 1722년 우의정 때 진도에 유배되어 몇 달 뒤 사약을 받았다.
 영의정 이산해(李山海 1539-1609)의 조부이자 이태중의 8대조 이질(李軼)의 동생인 사헌부감찰 이치(李穉)도 1504년 진도에 유배된 일이 있었다. 이치와 함께 진도에 유배되었던 호조참판 이창신(李昌臣)도 진도에서 죽고, 같이 온 영의정 윤필상(尹弼商)은 사약을 마시고도 빨리 죽지 않아 가졌던 독을 마셨다.
 이태중 진도유배 122년 전인 1628년에는 선조임금의 7남인 인성군 이기(李琪)가 왕살이 골창(임회면 폐동)에 적거되었다가 곧 자살을 명령받고 보내온 약을 마셨다.
 이보다 훨씬 전인 1498년에 와서 『금골산록(金骨山錄)』을 쓴 이주(李胄)는 유배 6년 만에 사약을 받았고, 위충(魏种)은 1392년에 와서 진도읍 남산리에 무덤을 남겼다. 그래서 노수신(盧守愼)은 19년을 사는 동안 지산면 안치리에 개 짖는 소리가 들리면 기둥 뒤에 몸을 감추고, ‘혹시 사약이 도착하는가?’ 하고 불안에 떨었다. 해가 지고 해변에 어둠이 깔리면 그때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쉰 곳이 珍島였다.
 진도보다 중죄인들이 유배되었된 흑산도(黑山島)는 뱃길이 아득하고 험하여 당초부터 “나는 죽었다!”면서 출발하는 유배처이지만, 그나마 안심된다는 진도는 사약 받은 분들이 많아 그만큼 무서운 곳이었다.

임금과 만난 다음 날 흑산도 유배

 1735년 음력 4월 25일 밤, 영조 임금은 사헌부 지평 이태중을 불렀다. 전날 올린 그의 상소 때문이었다. 얼마 전 암행어사를 사양하길래 의금부로 잡아 와서 취임을 명령했으나 거부했고, 사헌부 지평으로 임명했지만 응하지 않더니 상소를 올려 임금의 화를 폭발시킨 것이다. 탕평책 폐단을 지적했으며 묻는 말마다 주장을 굽히지 않고 대답했으니 영조의 말투가 평민처럼 거칠고 단호했다.
 “나를 섬길 마음이 있다면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하겠는가? 너 같은 자는 임금도 무시하는 사람이고 - - 마땅히 너의 머리를 장안 거리에 매달아야 하겠다.”
 “대답 ---- "
 "그만하라. 너를 처분하는 것은 종이 한 장이면 족하다!”
 “전하께서 저의 상소를 갑자기 당론이라고 의심하시니 죽더라도 눈을 감지 못하겠습니다”
 “네가 눈을 감지 못하는 것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이냐? 이태중은 군부를 업신여기며 역신을 두둔하였다. 그의 관직을 체차시키고 흑산도에 위리안치시키되, 길을 갑절이나 빨리하여 유배 보내도록 하라”(『영조실록』 42책 476쪽)
당시 이태중의 나이 42세로 영조 임금과 동갑이었다.
 죄인이 유배지에 도착하는 일정도 『의금부노정기』에 정해져 있었다. ‘한양에서 진도 12일 반, 제주도 13일’이니 흑산도는 13일 반쯤 되겠다. 당초 흑산도는 사람이 살기 어려운 절해고도라서 유배처에도 없었다. 영조도 즉위 초에 흑산도 정배에 대한 조치가 지켜지지 않았음을 스스로 개탄했지만 자신이 이태중을 흑산도로 보냈다.
 유배형은 죄에 따라 2천리, 2천5백리, 3천리 밖으로 보낸다고 『경국대전』에 기록되었다. 그러나 이는 중국의 명률(明律)에 따른 것이어서 한국에서는 그럴만한 거리가 없다. 한양에서 가장 먼 함경도 경원부가 1,680리에 지나지 않았다.
길을 갑절이나 빨리하여 유배지에 도착하라니 유배를 떠나면서부터 갑절로 고생이다. 유배길을 말을 타고 가면 하루에 70리, 나귀로 가면 하루에 50리, 마차로 가면 30리로 규정되었다. 따라서 절반인 7일 안으로 흑산도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2배의 속도로 가야 했기 때문에 밤낮을 쉬지 않고 달려야 했다.
 일반적으로 죄수들은 쇠사슬을 채우고, 중죄인 경우에는 칼을 목에 씌우고 족쇄를 체웠다. 왕의 친척이나 공신, 당상관, 양반의 부녀자는 중죄일 경우 목에 쇠사슬을 채웠고, 당하관이나 서인의 부녀자는 쇠사슬 족쇄를 채웠다.
 의금부나 형조에서 유배형을 받은 죄인을 호송하여 고을 수령에게 인계하는 일은 정2품 이상은 의금부 도사, 당상관은 서리, 당하관은 나장, 일반 백성들은 각 역의 역졸들이 압송했다. 따라서 이태중은 사헌부 지평으로 정5품이었지만 위리안치 중죄인이어서 의금부도사가 직접 압송했다고 보겠다. 진도군수는 죄인을 보수주인(保授主人)에게 위탁했는데 그는 지방의 유력자로서 집 한 채를 죄인이 거주할 곳으로 제공하면서 감호하는 책임을 졌다. 그곳을 '배소(配所)' 또는 '적소(謫所)'라 했다. 따라서 유배죄인들에게 있어서 보수주인은 절대권력자로 보였다.

이태중의 위리안치(圍籬安置)

 위리안치는 무서운 형벌이다. 유배 죄수들은 대개 기본으로 곤장이 선집행 된다. ‘곤장 ㅇ대에 ㅇㅇ로 유배!’ 식이다. 곤장은 100대도 부과 되었으며 현지에 도착하여 장독으로 죽는 경우도 있었다.
 독립가 주위에 높다란 나무 울타리를 막아놓고 자물쇠를 채운 뒤 바깥둘레에 탱자나무 등 가시 울타리를 치고는 그 앞에 수직소를 두어 죄인을 감시했다. 이태중은 1735년 4월25일부터 1736년 3월17일까지 1년을 흑산도 위리안치에 처해졌다. 그리고 3월18일 영암으로 이배 되었다가 연말에 풀려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이후 4차례 벼슬을 마다하더니 1740년 2월 20일 영조가 사간원 정언으로 임명하자 5월11일 사직소를 올렸다. 영조의 최측근 영의정 이광좌(李光佐)의 죄가 크니 그를 내쫓으라고 상소한 것이다. 임금에게 직격탄을 쏜 셈이다. 그래서 5월 19일 함경도 갑산 유배형이 내려졌다.
갑산은 서울에서 1,400리여서 15일 반 일정으로 하루 평균 90리를 달려야 당도한다. 갑산 유배생활은 3개월 만에 풀려났다. 그로부터 많은 벼슬자리를 사양하다가 1746년 윤3월 8일 밤 영조는 이태중과 단둘이 만났다. 청나라에 서장관으로 가서 외교압박을 해결해달라고 부탁한다. 청나라 황제 건륭이 청과 조선의 국경 책문을 조선쪽으로 30리나 옮기는 것을 막아내는 일이었다. 이태중은 자신의 관직이 아니라 나라를 위한 일이니 다녀오겠다고 대답했다.
 이후 이태중은 1746년 11월 창원안핵사를, 12월 11일 호서안핵사 서임을 받았지만 출사하지 않았다. 이듬해 2월 27일 보덕사로 삼았으나 역시 받지 않고 5월 18일 동래부사에 승임 되었지만 사직서를 올렸다. 5월 29일에는 종3품인 의주부윤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러자 영조는 이태중을 다시 의금부에 가두고 취임을 압박했지만 응하지 않았다. 임금은 7월 20일 그를 의주에 유배를 보내라고 명했다. 유배인으로서 의주부윤 직책을 수행하라는 것이었다.
 1747년 10월 15일 이태중은 학질이 심해져 의주에서 방면 후 고향 충청도 결성현 삼산으로 돌아왔다. 요즘 충남 보령시 천북면 신죽리이다. 1748년에 들어서면서부터 여러 벼슬이 또 내려지지만 역시 응하지 않았다. 7월 2일 병조참지, 11월 5일 동부승지, 11월 13일 우부승지, 11월 25일에는 동래부사로 임명했지만 받지 않았다. 1749년 2월 21일 공조참의, 3월에는 호조참의를 내리지만 상소를 내고 거절했다. 결국 그는 1749년 6월 4일 체포되어 7월 12일 또 갑산으로 유배당함과 동시에 갑산부사로 임명되었다.
 영조 임금은 1750년 1월 5일 지방직 가운데 최고의 자리인 전라관찰사에 이태중을 임명했다. 그러자 그는 사직상소를 내면서 왕명에 응하지 않았다. 당시 전라관찰사 연봉록이 24만 전으로 쌀 1가마니에 20전이니 쌀 1만2천 가마니였다. 결국 영조는 3월 26일 이태중을 전라관찰사에서 좌천시켜 진도군수로 삼고 유배를 보낸다.
 
유배인 진도군수 이태중

 이태중은 유배인으로 의주부윤과 갑산부사를 지냈고 진도군수로 보내졌다. 그이보다 28년 전에 진도에 와서 그해 사약을 받은 조태채는 가혹한 세금으로 신음하는 진도사람들의 실상을 시로 남겼다.(『二憂堂集』 拈咸字韻記本邑事實)
 『수령의 탐욕을 채우느라 관아 재정은 열악해지고
 공물로 귤을 바치느라 나무가 얼마 남아 있지 않으며
 세금을 마련하기 위해 면포를 짜서 시장에 내다 파니 옷이 없고
 어염전 절수와 정부의 어선에 대한 징수로 어업인이 큰 피해를 입고 있다』
 이태중의 진도유배는 진도사람들에게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고 봐야 맞다. 수령의 탐욕과 관리들의 수탈에 시달리고 있을 때 조선의 대표적 청백리가 나타났으니 말이다. 온갖 벼슬을 마다하면서 임금의 국정을 지속적으로 조언하다가 찍혀 흑산도로부터 갑산까지 유배를 다닌, 여태껏 접하지 못했던 군수가 왔으니 군민들은 그의 얼굴만 보아도 행복했을 것이다. 특히 진도향교를 중심으로 하는 유생들로부터 진도사람들에게 이태중의 소문은 급속히 퍼졌다고 보겠다.
 “---전하의 조정에는 장차 한 가지도 할 만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마땅히 강방하고 정직한 선비를 모아 대각에 배치하여 위로는 빈 것을 보충하고 빠진 것을 수습하며, 아래로는 죄과를 처단하고 부정을 규탄하여 광명한 치적을 나타내시옵소서.”(영조실록 52권 1740년 5월 11일) 평생을 이렇게 주장하다가 유배와 병으로 일관했다.
 이 군수는 죄인의 입장이라 관아에 있지 못하고 일반 가옥에 거처했다. 즉 ‘객살이’를 한 것이다. 이 집은 과거 황재(黃梓 1689-1756)가 1723년에 와서 3년간 유배생활을 하던 집이기도 하다. 이처럼 유배인들은 지정된 집을 계속 사용할 수도 있고 개인 집에 들어가 살 수도 있었다.
 이태중 진도 군수는 진도사람들로 보자면 매우 섭섭하게도 고생을 너무 많이 한 탓으로 병마가 도져 부임 5개월 만에 진도를 떠나야 했다. 그러자 진도유림들이 그분을 봉암서원(鳳巖書院)에 배향했다. 진도 유배인들 가운데서 진도의 교육문화발전에 크게 공헌하신 10명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한 곳이다.
 
 청백리 이태중

삼산 이태중은 진도 250여 명 유배인 가운데서도 가장 특별한 인물이다. 그는 무서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임금님까지도 전혀 무섭지 않았던 것은, 오직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공복(公僕)으로서의 신념 때문이었다. 삼산공은 부임처 마다 부패 비리풍조를 개선했으며 스스로 검소하여 밥상도 멸치 한 접시와 된장찌개로 만족했다. 재산이 많아지면 자식들에게 재앙이 된다고 했다. 평양감사 때도 녹봉 24만 전 가운데 23만 전은 공공사업과 어려운 백성을 위해 쓰고 자신은 1만 전으로 살아갔다.
많은 벼슬자리를 임명받았지만 대부분 사양하면서도 나라와 백성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거절하지 못했다. 1753년 4월 28일 황해감사를 임명받았지만 임금의 부탁 내용이 간절했다.
“해서(海西) 백성들은 지금 모두 죽겠다고 하니, 내가 서쪽을 돌보는 걱정을 풀도록 해달라”
“성교(聖敎)가 여기에 이르니 신이 어찌 감히 사임하겠습니까.”
“장차 어떻게 다스릴 터인가?”
“상하가 서로 믿지 아니한 지 오래입니다. 묘당(조정)은 도신(道神)을 믿지 아니하옵고, 도신은 수령을 믿지 아니하옵니다. 이래서는 무슨 일이 되겠습니까. 이러한 폐습을 통렬히 제거하는 것이 오늘의 급무입니다.”
“이 한 말만 들어도 해서의 일은 만족하도다. 어찌 다만 해서뿐이겠는가. 조정에서도 처음으로 득인(得人) 함이로다.”
이 같은 이태중의 인물 됨을 알게 된 진도사람들이 두고두고 가르침을 새기고자 그를 봉암서원에 배향했을 터이다.


 

 후손 이태복 전 복지부 장관이 부인 심복자 박사와 함께 수년간 관련자료를 수집하여 2019년 『청백리 삼산 이태중 평전』을 펴냈다. 출판 직전 두 분은 진도에 또 와서 숨은 자료 하나라도 더 있는지 돌아보았다. 자랑스러운 선조의 행적을 찾아다니는 후손의 아름다운 여행이었다.
(진도문화 101호 게재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