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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게시판의 "정만조" 내용입니다.
제목 정만조
작성일 2016-05-13 12:32:03 (최종수정일 : 2017-08-25 09:48:47), 관리자 조회수 298 회
〈정만조(鄭萬朝)〉

  조선말기 진도로 유배된 학자로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대경(大卿), 호는 무정(茂亭)이다. 서울 출신이고 아버지는 정기우(鄭基雨), 할아버지는 정윤용(鄭允容), 증조부는 정동일(鄭東逸)이다. 아들로 정인형(鄭寅衡)이 있다. 강위(姜瑋)의 문하에서 수하가해 문학에 일가를 이루었다.

1896년 4월에 1895년 8월역변과 10월무옥에 관련하여 일본공사 미우라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경복궁 화재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무고를 입고, 이완용 등의 모함으로 서주보(徐周輔)·정병조(鄭丙朝)·김경하(金經夏)·이태황(李台璜)·우낙선(禹洛善)·전준기(全晙基)·이범주(李範疇)·홍우덕(洪祐德)·정인흥(鄭寅興) 등과 함께 구금되었다.

심문을 받던 중 고종의 특명으로 우낙선과 함께 유배 15년형에 처해져 전라도 진도 금갑도에 유배되었다. 1907년 일제에 의해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고 순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그 해 12월에사면되어 관계(官界)에 복귀하였다.

곧 규장각부제학이되고, 현종·철종 양조의 『국조보감』편찬위원이 되었다. 1910년 우리나라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탄된 뒤에는 친일적인 경향을 띠어 이왕직전사관과 조선총독부의 중추원 촉탁, 그리고 조선사편수회의 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26년 경성제국대학의 강사가 되었고, 1929년에는 경학원의 대제학이 되어 명륜학원의 총재를겸임하였다. 이왕가실록의 실록편찬위원이 되어 『고종실록』·『순종실록』의 편찬사무를 주재하였다.

유배 중에 진도에 글방을 열고 2세 교육에 힘썼으며 진도 땅에 예술과 문화의 씨를 뿌린 개척자로서 진도민들의 추앙을 받았다.

그는 소재 노수신과 함께 수많은 진도 유배 인물 중에서 유배 기간이 길었던 관계로 진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정만조가 금갑도로 유배된 것을 안 이 고장 출신 문사들과 연소자들이 그를 찾아 가르침을 청하고 교유한 것이 『은파유필(恩波濡筆)』이라는 저서에 기록되어 있다.

진도군수의 청에 의하여 소치(小癡)가 살았던 의신면 사천리 운림산방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진도읍 동외리 원동마을에 큰 방을 열고 글을 가르쳤다. 이때 소년 허백련(許白鍊)도 8살 때 그의 공부방을 찾아가 글을 배우게 되었는데, 그에게 글을 배운 사람들이 20여 명이나 되었다 한다.

진도읍 교동리 현 삼성사에 있던 소전 손재형 생가에서 잠시 머무르며 소전을 가르치기도 했으며 그 은혜를 기리기 위해 바로 옆 하천 바위에 '무정은천(茂亭恩川)'이라는 글귀를 새겨 현재까지 전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디지털진도문화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