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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게시판의 "진도 삼별초의 성격" 내용입니다.
제목 진도 삼별초의 성격
작성일 2020-04-29 14:54:24 (최종수정일 : 2020-04-29 15:12:39), 관리자 조회수 46 회

진도 삼별초의 성격 게시물의 첨부파일 : 용장산성.jpg

진도 삼별초의 성격
(이 글은 지난 2010년 진도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 총평으로 목포대학교 최성락 교수의 글이다)


1. 고려 삼별초의 성격
 
고려 삼별초의 성격은 두 가지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하나는 몽고사를 연구하는 외부적인 관점이요, 다른 하나는 고려사 혹은 삼별초를 연구하는 내부적인 관점이다.
먼저 이개석교수는 13세기 중후반 몽골제국과 고려 및 삼별초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몽골은 1219년 1월 여몽형제맹약을 맺고 고려와 지배와 복속관계가 되었으나 1224년 공납물품을 받아서 돌아가던 사신이 피살되면서 이 관계가 중단되었다. 1231년몽골군대가 고려를 침략한 뒤에 고려가 다시 항복함으로써 복원되었으나 몽골에서 인질과 공납을 과도하게 요구하자 이에 견디지 못하고 고려는 1232년 6월 강화도로 천도하였다. 1258년 최씨무신정권이 붕괴된 뒤에 몽골의 압력에 견디지 못하고 고려 태자를 보내 투항하기로 결정하였다. 1260년 등극한 쿠빌라이 칸이 책봉-조공의 시스템을 활용하게 되었다. 1270년 이루어진 임연의 원종 폐립사건이나 삼별초의 봉기는 한반도에 몽골군대를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였고, 1271년 몽골군대는 고려와 함께 삼별초를 진압하게 되고, 많은 인질을 노획해 갔다. 그리고 제주도로 피난 간 삼별초는 1273년 4월 결국 진압되었다. 그리고 몽골군은 일본 정벌을 핑계로 더 많은 군대를 고려에 들여보냈다.
이상과 같이 이개석교수의 시각은 몽골사를 연구하는 입장에서 고려 삼별초를 바라보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삼별초는 당연히 제거되어야 할 세력인 것이므로 몽골은 고려 정부와 함께 삼별초 세력을 몰아내려고 하였던 것이고 군대를 파견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이교수는 임연의 원종 폐립사건이나 삼별초의 봉기가 몽골군대를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였고, 몽골의 지배(즉 예속화)를 강화하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고 해석하고 있다.
한편 윤용혁교수는 고려사를 전공하는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다. 윤교수는 이미 삼별초에 대한 많은 연구를 한 바가 있는 전문가이다. 이번 발표에서는 몇 가지 새로운 주장을 하였다. 첫째, 기록에 의하면 삼별초는 6월 1일 배중손이 승화후 온을 왕으로 옹립하고 신정부를 출범하였고, 바로 다음날 강화도를 철수하여 8월 19일에 진도에서 거점을 확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윤교수는 강화도에서 진도까지의 철수 기간이 너무 길다고 판단하고, 7월 13일 경에는 이미 진도에 당도하였을 것으로 주장하였다. 둘째, 진도 거점의 삼별초는 남해연안과 도서지역 일대를 그 세력범위로 확보하고 있었는데 9월 나주 공방에서는 실패하였고, 11월 제주도 점거는 성공하였다는 것이다. 셋째, 1271년 5월에 이루어진 삼별초와 고려-몽골 연합군과의 전투과정에서 윤교수는 연합군의 용장성 진입루트, 삼별초의 제주도로 퇴각과정, 벽파진의 중요성 등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넷째, 삼별초가 입거하기 전에 용장산성이 축조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에 반하여 그는 용장산성이나 용장성의 건축은 삼별초가 입거한 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윤교수는 용장성의 건물지를 천도라는 관점에서 궁궐 혹은 고려 도성의 개념으로 이해하여야 하고, 금골산의 해원사를 최항과 연관하여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제기하면서 삼별초를 지역간 혹은 국제적인 교류의 매개체로 활용하는 문제에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즉 그는 삼별초를 호국적 측면뿐만 아니라 국제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는 개념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진도 삼별초는 결코 몽골과 고려 정부와의 관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구체적으로 논의되지 못하였지만 진도 삼별초와 일본과의 외교적인 관계도 이루어졌다. 1271년 삼별초는 일본 정부(가마쿠라 막부)에 서간을 보내 물자와 지원을 요구하면서 더불어 반몽고전선을 구축하고자 시도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이것이 일본 정부로 하여금 후에 몽골-고려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또한 삼별초는 제주도를 거쳐 최후에 일부 세력이 오키나와로 이주한 흔적이 고려기와 등 유물로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고려 삼별초는 단순히 몽골과의 관계에 머문 것이 아니라 13세기 동아시아의 정세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2. 진도 삼별초와 용장성의 성격
 
진도 삼별초와 용장성과 관련하여 모두 네 연구자의 발표가 있었다. 먼저 최연식교수는 삼별초가 진도에 들어오기 전의 역사적 상황을 설명하려고 하였다. 즉 진도의 원명칭인 因珍島의 의미, 고대-고려시기 치소의 위치, 고려시대 진도에 있었던 占察院의 성격, 고려무인정권과 진도와의 관계 등이다. 먼저 그는 인진도를 백제 때부터의 이름인 진도를 계승하였다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인달()섬’을 한자로 기록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또 고대 및 고려시기의 치소의 위치를 일반적으로 보고 있는 고군면 고성리가 아닌 그 주변의 산지에 위치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11세기 전반의 점찰원을 불교의 사찰이며 占察山에 위치한다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그는 진도가 무인정권의 주요한 경제적 기반이었다는 점이 중요하고, 삼별초가 이 지역으로 쉽게 올 수 있었던 것이 최항 이래 진도를거점으로 하여 주변 지역을 관리해 본 역사적 경험에 의한 것이 아닌가 하였다.
다음으로 박종진교수는 고려 도성이라는 관점에서 진도 용장성에 관한 논의를 전개하였다. 즉 개성의 도성은 나성, 황성, 궁성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강화도의 도성도 내성-외성-중성 혹은 궁성-내성(중성)-외성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진도의 경우 외성(나성)과 용장성을 궁성으로 하는 구조이며 용장산성은 이전에 쌓았던 입보산성을 이용하였고, 궁궐 역시 그곳에 있던 절터를 이용하여 건설한 것으로 본다면 고려 도성의 모습을 찾는 것은 무리이지만 용장성에는 많은 건물지가 있어 다른 입보산성과 다른 점은 인정한다는 것이다.
반면 고용규선생은 그간의 발굴성과를 중심으로 다른 견해를 제시하였다. 용장산성은 내성과 외성(나성)으로 구성되어 있고, 내성에는 왕궁지가 있으며 왕궁지는 수 차례의 발굴을 통해 개성 만월대와 유사한 건물지가 나타나고 있고, 석탑의 塔身石이 발견되어 왕궁지 이전에 석탑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는 것이다. 또 외성은 총 13km의 석축성이며 부대시설로 6개소의 성문, 치 2개소, 적대 1개소 등이 확인되었고, 선황산 정상부에 제사유적이 확인된 바가 있다. 그는 용장산성의 축조시기를 출토된「癸卯三月大匠惠印」명 명문기와, 13-14세기 청자류 등으로 보아 1243년(고종 30)으로 보았다. 즉 삼별초가 입도하기 전에 이미 축조되어 海島立保處로 활용되고 있었으며 1270년 삼별초군이 진도에 들어오면서 내성(왕궁의 주변 토루)과 외성(용장산성)으로 이루어진 도성체제를 갖추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케다(池田榮史)교수는 오키나와 고려기와의 연구와 향후전망에 대하여 발표하였다. 류큐열도(琉球列島)에서 출토된 고려기와는 암막새, 수막새, 암키와, 수키와 및 기타 役瓦로 분류된다. 그 중에서 암키와의 볼록면에 새겨진「癸酉年高麗瓦匠造」가 가장 주목받고 있다. 그런데 계유년의 연대가 1153년설, 1273년설, 1233년설, 1333년설, 1393년설 등이 있는데 발표자는 종래 1273년설을 주장하였으나 이번 발표에서는 1333년설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토론자로 온 토다(戶田有二)교수는「癸酉年」의 경우, 여전히 1273년 설이 유력하다고 하였다. 즉 1273년은 바로 제주도에서 삼별초가 붕괴되었던 연대로 삼별초 잔여세력들이 오키나와로 갔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