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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게시판의 "고려 삼별초의 성립과 대몽항쟁" 내용입니다.
제목 고려 삼별초의 성립과 대몽항쟁
작성일 2017-06-20 10:58:33 (최종수정일 : 2017-06-20 16:55:21), 관리자 조회수 248 회

13세기 초 유라시아 대륙을 평정한 몽골제국은 1231년(고종18) 고려를 침략하였다.
아시아는 물론 유럽을 재패한 몽골제국과의 전쟁은 이로부터 40여년간 이어진다.
고려는 1232년(고종19) 300년간 지켜온 개경을 포기하고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야
했으며,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다. 1270년(원종11)고려 정부가 몽골에
항복하고 개경으로 환도하자 고려 무인정권의 군사적 기반이었던 삼별초는 대몽항전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삼별초는 고려시대 치안 및 국방의 임무를 수행한 좌별초,우별초,
신의군을 말한다.이들은 집권자인 최씨 무신정권의 사병적(私兵的)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국가의 녹을 먹는 정부군으로 야간순찰 및 지방에서 봉기한
농민들과 같은 체제 이탈 세력을 진압하는데 동원되기도 하였다. 오랜 세월 몽골의 침략에
맞서 싸운 첨병으로서 삼별초는우리 민족의 대외항쟁사를 구성할 만큼 대몽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몽골에 대한 적개심이 매우 깊었던 삼별초는 고려가
대몽전쟁을 포기하고 개경으로 환도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몽골에 대한 항복이자
예속을 뜻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한편으로는대몽전쟁이 종결되면 삼별초의 주요한
임무가 사라질 뿐만 아니라 대몽전쟁을 주도한 그들의 기득권과 생명에 위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개경정부에서 삼별초를 혁파하고그 '명적(名籍) ' 을 거둬가자, 그것이
원나라에 알려질 것을 두려워해 반란을 일으켰다는 기록에서 짐작할 수가 있는 일이다

.배중손은 야별초 지유 노영희 (指諭 盧永禧)등과 더불어 변란을 일으키고 사람들을 시켜
나라 안에 이렇게 외침으로써 사람들을 선동하였다.몽골에 굴복한 원종의 개경정권에
대해서도, 적대감을 공공연히 드러냈던 것이다. 결국 삼별초는 반개경 정부.반몽골의
노선을 표방하고 거병하기에 이른다.1270년(원종11) 5월23일 재추(宰樞)의 개경환도
결정에 반대하며, 5월29일의 삼별초 해산 조치에 맞아서 6월 초하루에 승화후 온
(承化候  溫)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후 관부를 설치하고 관원을 임명하는 등신정부
수립에 착수한 뒤 6월3일 반몽골 반정부의 자주 깃발을 들고 강도(江都)의  재물과 인원을
휘몰아 1천여 척의 선박을 이끌고 서해안을 따라 진도로 향하였다.몽골에 항복한 원종 및
개경정부를  반대하며 고려왕조의 정통을 계승하는 새로운 정권이 진도에 들어선 셈이다.

강화도를 포기하고 더욱 멀리 떨어진 바다의 섬으로 도읍을 옮기려는, 무인정권의 이른바
'해도재천(海島再遷) ' 혹은 ' 해도심입(海島深入) ' 구상은 원종 초년부터 있었음이 확인된다.
최씨 정권이 붕괴되고, 고려와 몽골의 군주가 교체되며, 고려 태자(元宗)의 입조에 따라
여몽관계에서도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는 등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에 위기감을 느끼던
집권무인들 사이에서 진작부터 그것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논의되던 것이다.
삼별초가 봉기하기 10여 년 전의 일이었다. 당시 해도재천지로 가장 먼저 언급된 것은
제주도였다.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넓은 바다에 위치해서 몽골군의 공격을 방어하기에
유리하고 해로를 통해 일본이나 남송과 연결하는 데 유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로 들어선 삼별초정권이 선택한 곳은 천혜의 요새지 진도였다. 고려왕조의 정통을
계승한 정부임을 표방하던 그들로서는, 본토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거점을 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본토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제주도보다는 진도가
적지였던 것이다.

진도는 우리나라에서 제주도, 거제도에 이어 세 번째로 큰 섬이다.
해안지대를 비롯하여 내륙에까지도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인데다 풍부한 해산물과 함께
옥주(沃州)라 불릴 만큼 비옥하고 넓은 농토에서 산출되는 곡물이 적지 않아 외부로부터의
고립에 대비하는데 유리하였다. 또한 강화도와 달리 개경과 상당한 거리를 둠으로써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더욱이 진도와 해남사이 294m의 좁은 물목은 시속 11노트의
조류가 들고 나,바다가 울고 물이 돈다고 하여 명량(鳴梁)이라 부르는 천혜의 요새지이며
연안 해상교통의 요충지로서 경상도와 전라도의 조운로를 장악할 수 있었다. 삼별초군은 6월
3일 강화도를 출발하여 천여척의 배에 재물과 백성을 싣고 새해안의 섬들을 경략하면서
조직을 정비하고 식량과 식수 등을 공급받으며 진도의 용장성으로 향하였다. 진도와 해남사이
울두목 물살이 용솟음치는 거대한 천연 해자인 명량(鳴梁) 바다와 인접한 진도의 벽파진
포구에 8월19일 도착하였다.

진도의 벽파진을 거쳐 용장성에 도착한 삼별초는 곧바로 새수도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건설한 궁궐과 성곽은 오늘날 거의 남아 있지 않다.다만 유적지 조사보고에 의하면,
도성이었던 용장성은 총 길이가 약13㎞에 이르며 성안의 면적은 258만평 정도로 추산된다고 한다.
궁궐은 기존의 용장사를 중심으로 조성하였는데
현재 나타난 건물 유적지만도 약 7천 평에
이르는 것으로 전한다. 진도의 새 정부는 스스로고려의 정통성이 있음을 자부하였다. 1271년
진도정부가 일본에 보낸 외교문서와 개경고려정부에서 보낸 국서를 비교한 고려첩장불심조조
(高麗牒狀不審條條)에서도 후삼국의 분열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룩한 고려의 정통 정권으로
40년 대몽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몽골의 풍속을 오랑캐의 습속이라고
비난하며 일본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새로운 정권의 성립이후 그 존재를 국제적으로 알리는
동시에, 몽골의 침략 위협에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이었다. 도한 고려시대에
유행한 참설 중에 '고려왕손이 12대가 되면 끊어지고 남쪽에 황제의 수도가 건설된다는
풍수도참설을 내세워 삼별초 진도정권의 정당성을 강조하였다.

진도에 웅거한 삼별초정권은 급속히 세력을 확장해갔다. 전라도 지방의 연안과 섬은 물론
경상도의 남해.거제.마산.김해 등지가 삼별초의 세력권 안에 들게 되었다. 남해도는 유존혁
장군을 배치하여 경상도 연안을 경략하고 완도에는 송징 장군을 배치하여 전라도 남해안 일대를
관할하였다. 특히 주목할 것은 11월 즉 진도에 도착한 지 3개월 만에 이들이 멀리 제주도까지
공랶하였다는 사실이다. 남방 해상 교통의 요충지로서 남송이나 일본과 연결되는 요로에 위치하는
이 섬을 장악함으로 해서, 삼별초정권은 이제 안전한 후방기지를 확보하였다. 진도를 거점으로
하여 통일신라시기 장보고가 건설한 청해진을 연상케 하는 해상왕국을 건설한 셈이다.
진도의 삼별초정권이 경상도와 전라도 연안을 지나는 조운로를 장악하자 개경정부의 재정상태가
어렵게 되었다, 군량의 수급조차 제대로 맞출 수가 없었기 때문에 진도탈환이 시급하였다.
원나라의 입장에서도 삼별초와 남송의 동맹을 방지하고 또한 일본을 정복하려는 야욕을 달성하기
위해서 진도토벌은 필수적이었다. 개경정부와 원에서는 각각 김방경(金方慶)과 아해(阿海)를
사령관으로 삼아 진도를 공격하도록 하였다.그러나 삼별초군의 완강한 저항을 받아 패배하고
말았다. 이후 개경정부와 원나라는 전함을 다수 확보하는 등 무기와 군사력을 대폭 증강시켰다.
마침내 이들은 모든 전투력을 총집결하여 진도 공략을 감행하였다.

여몽 연합의 진압군은 중군, 좌군, 우군의 세 부대로 나뉘어 세 방면에서 진도를 공격하였다.
고려군 사령관 김방경과 몽골군 사령관 흔도(炘都)는 중군을 거느리고 정면의 벽파진을 공격
하였다. 몽골 장수 홍다구(洪茶丘)와 영령공의 아들인 희(熙)와 옹(雍)이 거느린 좌군은 노루목
쪽으로 저항을 받지 않고 상륙하여, 지막리 .오산리 방면을 거쳐 두시난골로 접어들어 용장성의
뒷편 골짜기로 진격하였다. 또 대장군 김석(金錫)과 몽골 장수 고을마(高乙磨)가 거느린 우군은
군직구미(軍直仇味)로 상륙하여 도적골을 거쳐 용장서의 동쪽인 난곡으로 진격하였다. 삼별초군은
이러한 양동작전을 간파하지 못하고 중군과의 전투에만 집중하다가 좌.우군으로부터 측면과
후방의 공격을 받아 그만 대패하였다. 이로써 삼별초 해상왕국 용장궁성은 불타 버리고 말았다.
삼별초 항쟁의 본거지였던 용장성(사적 제 126호)은 700여년이 지나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목포대학교 학술발굴조사 결과 왕궁지와 내성, 대규모 산성, 사찰, 제사유적 등이 확인되었다.
2015년 발굴조사에서 '금사사(金沙寺)'가 새겨진 기와가 왕궁지 궁장(宮墻-궁궐을 둘러싼 담장)
에서 출토되면서 용장성은 금사사라는 사찰을 개조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271년 5월 용장성이 함락되자 삼별초군은 금갑과 남도포의 두 갈래로 달아났다. 이들이
남으로 내려갈 때 진도정부의 왕 승화후 온은 몽골 홍다구 부대의 추격을 받아 사천리 논수골
에서 붙잡혀 아들 환(桓)과 함께 참살되었다. 한편 왕을 잃고 쫓기던 삼별초군은 돈지벌에서
몰살되어 떼무덤을 이루었고, 여기 급창둠멍의 깊은 물에 수많은 여인들이 동백꽃처럼
투신했다는 설이 전해진다 김통정 부대는 배를 타고 제주도로 들어가 남해도의 유존혁 부대와
합세하여 제주도에서 항전하였다.
한편 배중손 부대는 남도포 방면으로 향하여 최후까지 항전했지만 끝내 죽임을 당하고, 잔여
군사들은 바다 건너 섬으로 들어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조도면 상조도 동구에서는 오늘날에도
많은 기와편들이 출토되었으며, 도적골이라 불리는데 옛날 삼별초 잔당들이 이곳에서 지나가는
배를 임검하며 살았다고 전해진다. 삼별초 진도 정부가 무너지자 1만여 명의 진도 백성들은 몽골의
포로가 되어 이국만리 원나라까지 끌려갔다. 제주도로 건너간 삼별초군은 김방경과 흔도가 이끄는
여몽연합군에 대항하여 김통정 장군의 지휘 아래 원종14년(1273) 4월 최후까지 항전하였으나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이로써 1270년 6월 이래 강화도에서 진도 그리고 제주도 등지로 옮겨가면서
약 3년 가량 계속된 삼별초의 대몽전쟁은 막을 내린다.

그동안 우리의 사관(史觀)은 국가와 민족으리 위한 봉기나 항전이라도 정권(정부)에 저항하면
반역이 되듯 구국항쟁인 삼별초 역시 '난'으로 평가, 기록하였다. 그러나 1977년 이후 삼별초
호국정신이 재평가 되면서 삼별초항쟁은 '민족.민중의 항전으로서의 삼별초' 로 평가되고 있다.
외세의 침략에 굴복하여 속국이 되지 않기 위해 죽음으로 나라를 지킨 삼별초의 봉기를 반란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은 당연한 역사기록이다.
오늘날 몽골제국에 맞서 싸운 삼별초 진도항쟁의 활약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왕온의 묘 인근에
'운림삼별초공원'을 조성하고 삼별초기념관을 건립하였다. 아울러 진도문화원에서는 용장성
삼별초 충혼탑에서 매년 5월15일, 삼별초 항몽순의제례를 봉행하여 삼별초 용사들의 원혼을
추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