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예술이 꽃피는 행복한 진도

역사

  • home
  • 역사와문화
  • 역사
역사 게시판의 "진도의 역사와 지리(임진 정유왜란과 진도 제1절)" 내용입니다.
제목 진도의 역사와 지리(임진 정유왜란과 진도 제1절)
작성일 2016-05-04 09:15:04, 관리자 조회수 484 회
진도의 역사와 지리
 
 진도는 한반도의 서남단에 위치한 섬으로 수려한 산세와 비옥한 들녘, 그리고 푸른바다가 한데 어울려 한폭의 풍경화와도 같은 아름다운 곳이다. 특히나 한반도 서남부 해로의 요충지로서 한국 역사상 크고 작은 흔적들을 남긴 곳이고, 다양하고 특이한 민속문화가 전승되어 많은 연구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진도의 지형은 소백산맥의 지맥이 서남단으로 뻗어 나와서 침강한 결과로 생긴 섬으로, 원래는 해남군의 옥매산과 일성산을 연결하는 화원산매그이 한 갈래였다고 보여진다. 즉 원래는 육지와 붙어 있었으나 마로해와 명량해협 부근이 침강하면서 섬이 되었으며, 그래서 높은 산이 없는 구릉성 산지가 태반이고 대평야나 큰 하천이 없다. 진도의 산지들은 금골산, 첨찰산, 여귀산, 지력산 백야산 등 5개 산맥으로 나눌 수 있다.
 금골산맥은 해남에서 해저를 건너와 이루어진 산맥으로 녹진으로부터 남쪽으로 내려와 산맥의 주봉인 금골산(해발 : 193m)을 이루고 다시 뻗어 광덕산에서는 동서 두 가지로 갈리었는데, 서쪽으로는 군내면 분토리의 고두산, 동쪽으로는 군내면 용장리의 선황산으로 동쪽해안에 다다른다. 첨찰산맥은 진도의 동반부 중앙에 우뚝 솟은 첨찰산(해발 : 485m)을 주봉으로 흡사 우산을 펼친것처럼 장엄수려하고 정상에서는 진도군의 전역을 관망할 수 있는 산이다. 이 산맥의 동쪽은 동쪽의 안산 米峰에 이르고, 동남쪽은 덕신산을 거쳐 의신면 회동 초사리 해안에 이르렀으며, 남서쪽의 한 가지는 의신면과 진도읍의 경계를 이루어 포산리까지 이르렀고, 서북쪽의 지맥은 철마산(망적산)·부지산·연대봉을 이루고 있다.
 한편 여귀산맥은 여성적인 수려함을 자랑하는 여귀산(해발 : 452m)을 주봉으로 한다. 여귀산은 남성적인 웅대함을 보여주는 첨찰산과 함께 진도의 대표적인 양대 高山으로 이곳 정상에서 멀리 내다 보이는 추자해는 절경을 이룬다. 여귀산맥중 남부해안을 등에 지고 동북방으로 뻗어나간 한 가지는 장구포에 이르고 또 남쪽으로는 고정 매정에 이르러 소포만에까지 펼쳐져 있다. 그리고 지력산맥은 서남단의 지력산(해발 : 325m)을 주봉으로 하여 지산면의 전 해안선에 연하여 펼쳐져 있고, 서남쪽의 한 지역은 심동까지 펼쳐져 기암괴석이 연속된다. 또 동북쪽의 한 가지는 지산면 북동부 일대를 점하여 높지도 낮지도 않은 구릉으ㅗ 소포만 입구에 이른다. 끝으로 백야산맥은 서남단에 용출한 백야산(해발 : 251m, 이령 희야산)을 주봉으로 하여 서남쪽으로는 서망에 이르러 해저를 건너 조도를 이룬다. 북쪽의 지맥은 십일시를 거쳐 소포만까지 펼쳐져 있다.
 한편 진도의 하천은 대부분 바다로 연결되는 하구를 지니는 것이 특징인데 이를 발원지(산맥)별로 살펴보면 금골산맥에 용장천, 첨찰산맥에 월가천·군내천·고군천·지곡천·향동천·회동천·초사천·의신천·옥대천·용연천 등이 있으며, 여귀산맥은 임회천·석교천, 지력산맥에는 지산천·와우천·고야천, 그리고 백야산맥에는 백동천·연동천 등이 있다.
 한편 진도군은 동쪽으로 해남군, 남쪽으로 완도군, 북쪽으로는 신안군과 각각 인접하여 서남해의 섬지역과 섬지역, 그리고 서남해안과 이들 섬역을 연결하는 중간 다리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같은 진도지역이 지닌 지리적인 위치는 비단 오늘날의 상황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고대사회로 소급할 수록 그 의미가 컸다고 할 수 있다. 진도와 한반도의 서남해안을 가로지르는 물길은 역사지리적인 역할이 다른 어느 곳보다도 컸던 곳이었다. 즉 명량해협을 포함하여 한반도의 서남부를 경유하는 이 해로는 고대사에서는 <中國-韓半島-日本>을 연결한 국제문화의 주요 이동로였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漕運路로써 그 의미가 돋보여지는 바닷길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같은 입지적 조건은 진도의 문화가 중층성과 다양성을 지니게 하였고, 결국 진도문화와 연관되는 인접지역의 문화양상과의 비교하므로써 한국문화의 전파와 이동을 검토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이같은 자연조선은 다른 측면에서 진도민에게 또다른 역사적 경험을 하게 하였으니, 고려시대의 삼별초항쟁이나 본고에서 다루는 왜란같은 내우외환의 과정에서 원하지 않는 중심지로 부각되기도 하였고, 크고 작은 피해도 입은 것이 사실이다.
현재 진도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일부 몇 개의 성씨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임진왜란이후에 섬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조상들(入島祖)의 피붙이로, 그들은 한반도의 서남부지역에서 주로 이들 해로를 따라 이동해 온사람들이었다. 따라서 현재 전승되는 진도의 여러 문화상들은 어쩌면 이같은 문화전파의 과정을 증거하는 것으로 내륙문화의 임란이전 문화기반과 관련될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이들 입도조들에 의하여 많은 주민구성이 생겨나기 이전의 진도지역에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현재 주민의 직계혈조들(입돚)의 경우는 고려말 왜구의 침탈로 인하여 진도가 공백상태에 있다가 새롭게 건설되면서, 혹은 왜란이라고 하는 국가적인 환란의 와중에서 다시한번 커다란 파장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주를 해왔었다고 파악되는 것이다.
이미 선사시대부터 이곳 진도 지역에는 많은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현재까지 조사 정리된 진도군의 선사문화는 청동기시대의 지석묘로 대표된다. 진도지역은 일찍부터 연구조사의 대상이 되어 1967년 서울대 동아문화연구소의 조사, 1977년에는 전남대 호남문화연구소 조사, 1983년도 목포대 박물관에서 실시한 지표조사가 있었으며, 이들 조사의 결과는 1986년에 목포대 박물관과 진도군의 문화유적조사보고서『진도군의 문화유적』으로 종합 정리되었다. 이에 따르면 진도지역의 청동기시대 유적으로는 지석묘 54개군 360여기, 입석 9기 및 5개소의 유물산포지가 있다.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모제로써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해안에서 가까운 평지나 그릉 경사면에 자리잡고 있는데 아직까지 진도에서는 지석묘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예가 없고 주거지나 패총 등도 확인되지 않고 있어 그 당시의 생활상 연구가 이루어지지는 않은 실정이다. 그러나 유물산포지를 중심으로 무문토기, 적갈색경질토기, 석봉, 석추, 석부, 전석 등 다양한 유적이 발견되ㅓ 많은 주민들이 생활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다만 진도의 이들 청동기시대 문화가 어디로부터 어떻게 유입, 전파괴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지금까지 조사 정리된 성과로 봐서는 이 시기에 이웃하 해남군에서 발견된 유물들과 종류가 비슷하며, 아울러 해남군과 가장 인접한 고군면(109기)에 가장 많이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진도군과 해남군은 이미 이 시기부터 문화적으로 상당한 관련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같은 선사시대의 문화기반은 뒤이어 마한시대와 백제시대로 이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생업조건이나 산업구조가 바뀌지 않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진도는 위치상 삼한중 당연히 마한의 세력범위에 속했다. 『晉書』에 “馬韓의 新彌諸國 등 20餘國이 산을 의지하고 바다를 대하고 있다”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당시 해안 도서지역에는 강력한 부족세력들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더욱이 千寬宇같은 이는 마한때 진도에 楚山塗卑離國이 있었던 것 같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특히 백제시대에 진도지역에 세 개의 고을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같은 개연성을 구체적으로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즉 백제시대의 郡縣治所가 마련되었다는 것은 이미 그 시기 이전부터 토착적인 문화집단이 이곳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도는 내륙과 떨어져 있는 지리적 여건 때문에 마한세력이 백제에 복속되고 얼마간의 기간이 지난 뒤까지도 마한의 잔여 부족집단이 여전히 중심세력으로 남아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진도지역은 적어도 기원전후로부터 5세기 후반까지는 마한의 지배 세력하에 있었다고 볼 수 있고, 선사유적이 많이 나타나는 고군면, 임회면, 의시년 일대 등지에 바로 이들 마한의 소국들이 자리잡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이는 바닷길과 관련된 지리적 요인과도 깊은 연관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백제시대에 진도지역에 설치되었던 세 개의 郡·縣은
①현재의 군내면 송산리 일대에 설치되었던 珍島郡,
②군내면 분토리·상가리 일대의 徒山縣(猿山縣),
③임회면 송정리 일대의 買仇里縣
등이다. 백제시대의 이들 郡·縣간의 소속 관계는 분명하지 않지만 고성리일대를 중심으로 했던 珍島郡이 가장 tswls적인 세력이었던 것같고, 그 예하에 令屬縣으로 臨淮縣과 徒山縣(猿山縣)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상에 나타난다. 이 시기 진도 인근지역에는 현재의 해남군 현산면 일원에 자리잡았던 塞琴, 화원반도의 黃述縣, 마산면·계곡면 일원의 古西伊縣, 현재의 강진군 남부에 자리하였던 道武郡 등이 있었다. 진도군을 중심으로 한 買仇里縣, 猿山縣등은 이들 지역과 바닷길을 이용하여 서로 교류했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당시의 군현들이 대부분 해안가에 위치하였다는 점이다. 즉 이들 군현의 해안가 위치는 바로 당시대 여러 세력들이 해로나 바다와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는 점과 함께 이들 군현들은 바로 이들 지역에 있었던 기존 세력의 존재가 크고 강했다거나, 아니면 서남해안으로 연결되는 바다길과 그 연안의 통제를 위해 목적있는 거점들을 확보하고 요새를 구축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고대해로와 군현설치를 필자가 보는대로당시의 해로가 전반적인 문화성격에 밀착된 결과요 배경이었다고 할때 이 백제시대에도 명량햐협은 그 길목으로서의 의미가 매우 컷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행정체계는 뒤이은 통일신라시대까지 연결되어 해안지역에 설치되었던 백제의 여러 군현들은 백제가 신라에 병합된 후 단지 그 이름만을 한자식으로 개칭한체 영역의 변화없이 존속하였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가 되면 주변지역 군현들의 세력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이 시기 서남해안 지역에서 세력과 영역을 확장한 군으로는 務安郡과 潘南郡 그리고 陽武郡(현재의 영암군 일대와 강진군)을 들 수 있다. 이렇게 서남해안의 군현세력이 확대된 까닭은 영산강을 포함하여 한반도의 서남부를 경유하는 해로가 통일신라시대에 다시 주목된 때문이었을 것이다.
통일기의 상황을 우리가 기록으로 증거할 수는 없지만 결과만을 놓고 보면, 고군면 고성리 일대의 珍島郡과 의신면 일대의 세력들은 신라통일전쟁때 친백제세력으로 신라세력에 강한 반발을 하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것은 통이후 통일신라 정부가 고성리의 珍島郡지역을 황무지화시켜 두었다가 務安郡의 영속현으로 강등시키고 친신라계 집단인 무안지역 세력을 부식시켜 관할토록 했던 것에서 일부 추정이 가능하다(務安朴氏가 오늘날 진도에 많은 것은 이때부터의 연고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이와 반대로 진도의 서북부라 할 군내면 월가리를 중심으로 한 지역은 고성쪽과 다르게 牢山郡으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이웃한 膽耽縣까지도 관할하는 세력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같이 같은 진도지역이면서도 변환기에 서로 다른 길을 선택했던 경험은 이후의 역사과정속에서도 재현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