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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수난의 역사
작성일 2015-04-23 12:49:09 (최종수정일 : 2015-06-22 15:00:53), 관리자 조회수 646 회

  옛 흔적 진도에는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흔적들이 있다. 아직 구석기 시대 유물은 발견된바 없으나 청동기 시절의 흔적인 고인돌(支石墓)은 4백여기가 조사되었다.
  섬 지역의 유적발굴이 시행되면 많은 자료가 나올만한 조개더미들이 많다. 하조도 신육리 읍구 조개무지에서는 갈돌이 수습되었고 관사도에서는 갈돌 도끼, 관매도에서는 돌살촉, 성남도에서는 어고 잡던 옛사람들의 그물추와 낚시 등이 나왔다.
  천관우씨는 진도군 군내면에 마한 때 '초산도비리국' 이란 나라가 있었던 것 같다고 비정한바 있다.
  백제 때 진도군내 북동부인 고군면에는 진도군이 있었고 북서부인 군내면 월가리에는 도산현(원산현)이 있었으며 남부인 임회면 봉상리에 메구리현이 있었다.
  나 · 당 연합군은 백제를 점령한 뒤 당나라는 전남지역을 대방주라 하고 나주회진의 죽군성에 진을 친 뒤 진도에 도산현을 두었으나 당나라 통치는 663년부터 671년까지의 8년간에 그쳤다. 중국 당나라도 진도의 중요성을 인정해 군대을 주둔시키고 직접 치정 했음을 알 수 있다. 통일 신라 때인 757년(경덕왕16)진도군은 진도현으로 낮춰 무안군에 소속시키고 당나라 군사들이 인연 맺은 도산현(추산현)은 오히려 뇌산군으로 승격 시켜 무주에 소속시키되 그 산하에 임회쪽 매구리현을 첨탐현이라 이름을 바꿔 뇌산군에 소속시켰다. 이때부터 무안군과 인연을 맺고 광주와도 왕래가 빈번해졌다.
  참고 892년 무주(지금의 광주)에서 견훤이 기병하자 진도는 진도는 자연스럽게 그 세력에 속했는데 909년 태봉국 궁예의 장수 왕건(후에 고려건국)이 나주를 치기 위해 먼저 진도를 차지해 진도는 후백제 세력에서 왕건 세력권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때 진도 뇌산군의 토박이 김령이란 호장이 왕건에 협력해 본 관을 진도로 하는 김씨 시조가 되었다고 옥주지는 적고 있다.
  1955년 간행된「진도김씨세보」에 보면 그들 시조는 신라 미추 왕때인 283년 중국에서 건너와 진도 죽포리(竹浦里)에서 살던 김국빈(金國)으로 신라 조정의 군국정사 벼슬을 지냈다고 정리하고 있으나 이때 진도는 백제 땅이었다.
  이 족보는 왕건 때 공훈을 세운이는 23세 김경호(敬浩)로 왕건태조가 옥주후(沃州後)로 봉했으며 묘가 진도읍 동쪽 20리 지점의 사현(沙峴)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현재 그 후손들은 경기도 수원 지방에 1파, 영남에 4파, 황해도 3파가 살고 있다.
  왕건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940년 행정구역을 개편했다. 군내면에 있던 뇌산군은 가홍군으로 바꾸고 남쪽의 첨탐현은 오늘날 면부 이름이 된 임회현으로 바뀌었다. 가흥이란 땅이름과 임회는 중국절강성에 있던 땅이름이다.
  현종이 나주에 피난왔다가 개성에 돌아가 1018년 행정 구역 개편 때 진도현을 나주목에 소속시킨다. 1144년(인조21) 진도현에 중앙관리인 현령이 처음으로 배치되고 그동안 무주(광주)에 속했던 가흥이나 임해현이 모두 진도현령 관할로 합해 명실상부한 나주목의 통치를 받는다.
  참고 진도에는 이때까지 동·서·남·북에 서로 근본이 다른 집단이 살아서 행정 구역이나 통치마저 독립적이었고 지금은 의신면도 의신향이라 하여 독립해 있었다. 진도 몸섬이 하나의 통치기구로 통합된 것은 고려 인조 때야 시작되었다.
  삼별초 왕국 1270년(원종11)8월 배중손, 김통정 장군등이 이끈 강화도 삼별초군이 원종 이 개성에 나가 몽고에 항복한데 반대해 1천여 척의 선단을 이끌고 진도에 들어과 왕족인 승화후 왕온을 왕으로 추대했다. 정통 자주 고려왕조르 주장하면서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는 등 외교활동도 벌인다. 1년 뒤인 1271년 5월 여몽연합군의 기습을 받아 김통정 장군과 일부는 제주로 옮겨갔다.
  당시 삼별초군이 왕궁으로 쓰던 왕궁으로 쓰던 용장산성(군내면 용장리)는 이제 페허가 되어 있지만 국구지정 사적 제126호로 보호받고 있다. 왕온은 진도읍과 의신면 사이 고갯길 '왕무덤재'에서 죽어 그의 무덤이 전라남도 기념물 제126호 지정되었다. 배중손 장군은 임회면 굴포리 포구에서 죽은 것으로 전해져 98년 이곳에 사당을 짓고 동상도 세웠다.
  진도군민들은 이때 삼별초군에 협력한 적군포로로 잡혀 몽고 군사들의 종이 되거나 몽고를 제주도에 몽고목장을 두고 진도에는 목장을 개설했다. 김통성 등은 용장성에서 쫓겨 왕무덤 고개를 넘어 의신면 금갑포를 통해 제주로 갔으나 그 뒤를 계속 추격 당해 왕무덤재에서 왕이 죽자 그 이웃 골짜기에서 최후의 반격으로 저항해 '난투골 (논수골)이란 지명이 생겼으며 이곳 골짜기를 흐르던 개천이 피로 물들어 '핏기내' 라 불렀으나 한문표기 때 '사천' (斜川)이 되어 의신면 운림산방 골짜기 냇이름이 되어 있다.
  이 골짜기에서 5리 거리의 의신면 소재지인 돈지에는 왕실의 급창들이 투신 자살했다는 '급창둠벙' 이 있으며 전사들을 함께 묻은 무덤이라는 '떼무덤' 이 있다. 삼별초 고려국이 연호를 '오랑' 이라 했다고 하여 흔히 진도에 오랑국이 있었다고 말하지만 이는 잘못이다. 오랑이란 말자체가 진도향고에서 필사되어 전해오는 진도 연혁편에서 나오지만 다른데에서는 전혀 기록이 없다.
  진도 피난 군청 몽고의 힘이 약화되고 고려왕실마저 통치력이 미약했던 1350년(충정왕2) 한반도 남해연안에는 왜구들이 침탈을 계속하고 진도로 현지 치정이 어렵게 되자 주민들은 이끌고 영암군 시종면(당시 월하지리와 명산리등 4개리)으로 피난을 갔다. 이곳 군청은 조선개국을 앞두고 왜구섬멸에 효과를 얻어 진도와 가까운 해남군 삼산면 원진리(당리 삼촌리)일대로 옮겨와 진도 귀향을 기다렸다.
  그러나 개국 후 국기가 안정되지 않아 조선왕조 2대 왕인 태종9년(1409년) 해남현과 죽산현 및 진도현을 합해 해진군(海珍郡)을 만들고 해남군 현산면 고읍리에 있던 해남군 치소를 삼산면 녹산역으로 정했다가 3년 후 지금의 해남읍(당시는 영암군 옥산현땅)으로 군치소를 옮겼다.
  1414년 진도에 목장을 개설하려고 했으나 왜구의 침노를 막을 수 없어서 취소했다. 세종 때 다시 국영 목장을 개설하고 제조목장 목리들을 대려와 관리 시켰다. 이 목장은 1895년까지 운영되었다.
  1431년 금갑과 남도포에 수군만호를 배치해 왜구의 침노에 대비했다. 1432년 함평 학교면 대곡에 있던 전라도수영 (해군기지사령부)이 목포로 옮기면서 목포만호가 황원(현 해남우수영)으로 옮겨오고 이곳에 이곳에 있던 주량포만호부가 지산면 소포로 옮겨와 진도방비에 완벽을 기했다.
  진도방비를 위한 수군배치가 끝나 안정성이 확보되자 1437년 해진군을 해남군과 진도군으로 분리, 진도군청을 고군면 고성리에 개설했다. 진도 군민들이 고향을 떠나 떠돌이 피난 생활을 한지 87년만의 일이었다.
  진도는 이처럼 왕도로 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섬이 크고 남해안의 길목에 자리잡아 전란이 일어날 때마다 수난을 겪어 진도섬 역사 곧 한반도의 역사이면서 변방 섬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수난사를 살필 수있는 본보기 땅이다.
  『세종실록』지리지를 보면 세종 때 진도 토박이 성씨가 나온다.

 △ 진도현 ··· 임(任) 김(金) 이(李) 한(韓) 정(鄭·亡姓 )

 △ 가흥현 ··· 조(曺) 정(丁) 김(金·속성) 여(呂) 평(平) 유(兪)

 △ 임회현 ··· 배(裵) 박(朴)

 △ 의신향 ··· 임(任) 나(羅) 김(金) 이(李)

   이 자료를 보면 세종 19년인 1437년 진도 이주가 허락된 시대의 기록에 토박이 성씨들이 나오고 정씨는 이미 떠난 성씨로 가흥현의 김씨는 새로 들어온 성씨로 나오는 것을 보아 이미 고려 때부터 진도 토박이 성씨들임을 알 수 있다. 칭량 조씨들은 스스로 고려말엽에 들어왔다고 주장하는 집안이다.
   오늘날 진도의  토반 성씨들은 대부분 조선초 초엽이나 임진왜란 이후에 들어온 것으로 족보체계가 꾸며져 있으나 사실은 고려때부터 살았던 집안도 있었을 것이란 생각을 갖는다.
  재미난 현상은 진도 땅이 무안에 소속된 탓이었던지 무안본관성씨인 정(丁)씨와 박(朴)씨가 진도와 깊은 인연을 갖고 있다. 고려현종 때 나주목 소속으로 바뀐 것과 관련해 나주본관성씨인 나(羅)씨가 진도 의신향 토박이 성씨였으며 삼별초 토평 때 나씨들이 큰공을 세워 득관하고 금성나씨 지조묘가 진도에 있었지만 묘를 실전 했다고 스스로 그들 족보에 적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성씨자료는 삼별초군의 중심 장군인 배중손이 진도를 찾아왔고 당시 진도 임회현의 토박이가 배씨였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이 배씨들은 뒷날 무안군에 속했던 인연을 찾아 진도군을 비울 때 무안 청계면으로 옮겨가 무안배씨 집안을 이루지 않았을까 상상해 볼 만하다.
   배중손과 진도 삼별초와 관련해 배중손이 진도 출신이었을 가능성도 검토 할 만하다.
   삼별초군은 최중헌(崔忠獻·1150~1219)이 거느린 개인 가병(家兵)으로 출발해 정권을 잡은 뒤 그의 아들 최이(崔怡·일명?~1249) 손자 최항(崔抗·?~1258) 증손자 최의(崔誼·?~1258)로 이어지는 동안 정규군과 같은 대우를 받은 집단이다.
   최중헌의 손자 최항은 본디 서자로 전남 승주 송광자 스님이 되어 만전(萬全)이라 했다. 커서 화순 쌍봉사 주지가 되어 전남 각지를 돌면서 무뢰한들과 어울렸고 권세를 부릴 때 진도 용장사에 와서 지내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가 적가가 없어 그 후계를 잇기 위해 다리 머리를 기르고 개서으로 돌아가 속인이 되고 아버지의 가병5백명을 인수받아 병부상서가 되고 정권을 장악했으므로 전남 사람들과 깊은 인연이 있었다.

   그의 양아들 최항을 죽인 김인준(金仁俊)이 광주사람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배중손도 최항이 승려로 진도 용장사에 와 있었을 때 인연을 맺어 삼별초 군에 발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최항이 정권을 잡은 해가 1249년이 고 배중손 장군이 삼별초를 이끌고 진도에 온 때는 1270년이므로 배중손 장군이 청년시절 용장사에 와 있던 최항을 만나 발탁되었다면 충분히 실제 사실이 될 수 있다.
   임진왜란과 울둘목 싸움 지금의 진도 읍성은 1440년에 쌓아 옮겨 왔다. 4개 현의로 갈려  있던 진도 땅을 다르리는 중심이었을뿐 아니라 고성이 바닷가에 가까워 왜구의 기습을 염려했던 것 같다. 진도 읍성도 전라남도 지정 문화재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당시 일본군은 경남 동래에 상륙해 곧장 서울을 함락하고 평양까지 선조대왕 어가를 쫓아갔으나 호남쪽에는 오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 선단의 일부는 진도에 쳐들어 왔든지 군민들로 구성된 수성군 애기가 나온다. 당시 진도군수는 선거이(宣居怡)로 이순신 장군의 부름을 받아 경상도 해역에서 싸웠지만 수성장군이었던 이대익(李大益)이 벽파진에서 왜선 3척을 불지르고 왜장 1명을 죽이는 전투에서 죽은 기록이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진도는 1597년에 재침해온 정유재난 때  큰 싸움터가 된다. 원균의 삼 도통제사 군대가 경상도 해역에서 대패하고 그 여세를 몰아 전라도를 향할때 이순신 장군은 해인사에 있던 수군에 백의 종군하고 있다가 삼도통제사 임명을 받는다. 그는 옛날 근무처인 여수를 찾아가 보았으나 빈집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보성,장흥해안을 돌면서 전선13척을 동원하고 급히 모은 수군을 이끌고 음력8월15일 진도 벽파진에서 당도했다. 이때 민간 피난선 1백여척도 합세했다. 이미 일본 수군 선단은 벽파진서 볼 수 있는 해남 어란포에 도착, 척후선을 벽파진 앞 해역의 감부도까지 보내 조선군의 형세를 관찰하고 갔다.
   이순신 장군은 급히 진도군민들과 해남 황산, 우수영, 화원 등지에서 민간들을 모아 우수영으로 병선을 옮기고 일본 병선들이 울둘목을 지나기를 기다렸다. 본디 음력 보름과 그뭄은 '사릿물때날' 로 바닷물의 유동이 심한 때 이다.조금물에도 7노트 유속의 울둘목은 사리물때가 되면 홍수 때 강물이 흐르듯이 시속 11~13노트(노트는1.853m)로 흐르므로 쏠살같이 흐른다고 말할 수 있다. 해남 어란포쪽에서 목포지역으로 흐르는 물이 240m의 좁은 울둘목에서 이르면 미쳐 이르지 못하고 해안에 부딧힌 물들이 빙글빙글 돌기도 하고 물이 20~50Cm이상의 낙차마저 생기면서 흘러 이물을 거슬러 올라 가는 여객선들을 30여 년 전까지도 녹진포구에 대기했다 갈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작은 나룻배 따위는 물이 흐르는 쪽으로 항해를 하더라도 빙글빙글 물살 때문에 전복할 위험성이 높다.
   충청도 아산 출신으로 무과에 급재한 뒤 고흥 발포만호를 지냈고 여수 좌수영수사와 삼도통제사를 지낸 이순신 장군이다. 이 장군은 영암 출신 김극희로부터 미리 건의를 받았지만 이물목의 지리적 특징을 진도 사람들로부터 자세히 듣고 이 물목을 최후의 격전장으로 선택했던 것 같다.
   물길이 센 좁은 목이라 정유재란 때 바람과 노를 저어 병선을 움직였던 왜군들은 한꺼번에 이 물목을 들어서지 못하고 2~3척씩 일정한 간격을 두고 다가 왔을 것이다. 이순신 수병들은 이 같은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작은 수의 병선만의로 왜구의 함대를 상대로 싸움을 할 수가 있었다.
   양쪽 연안에 화포를 배치하고 불질을 했을 것이므로 유리했을 뿐 아니라 6시간만 버티면 물이 반대방향으로 다시 쏜살같이 흘러서 미쳐 이 물목을 지나가지 못한 배는 후퇴하는 꼴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지형지리를 이용해 이긴 싸움이 명량대첩이다. 이 대첩을 기록한 비가 해남쪽 문내면 학동리 1467번지에 있다. 이 비는 1685년에 세운비로 1942년 일본인들이 경복극 근정전으로 옮겨 땅에 묻어 버린 것을 1947년 다시 옮겨와 세워 국가 문화재 보물 제503호 지정되었다. 비각이 세워젔으며 그 곁에 이순신 장군을 모신 충무사가 있다.
   진도 쪽에는 1956년 소전 손재협씨 글씨로 군내면 벽파진에 세웠다. 이순신 장군은 일본선단이 후퇴하자 이날밤 신안군 당사도로 물러났다가 영광 법성까지 후퇴했다.
   이 사이 일본수근들이 진도와 해남 우수영에 들어와 쑥밭을 만들고 말았다. 이충무공은 명량해협의 전쟁으로 세계 수전사에 남는 영웅이 되었으나 이름 없던 진도 사람들은 전쟁의 화살막이가 되어 죽고 일본군들의 보복적인 살육으로 죽어갔다.
   울둘목에서 15리 거리이고 용장성 산너머 오일시 입구인 고군면 도평리 산 117-1번지 일대에는 이름 없는 옛무덤 3백여 기가 몰려있는 공공 묘지가 있다. 이곳 사람들은 이 무덤들이  명량대첩때 죽은 진도사람들의 무덤이라고 말한다. 이 묘지에 정유재란 때 죽은 조흥량, 조명신, 김성진, 박헌등 선무원종 공신록훈으 받은 장수급 무덤들이 있어서 이 구전을 뒷받침하고 있다. 진도군은 이묘역을 손질하고 전라남도에 문화재지정을 신청한바 있다.
   진도부 승격 19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조선 영해에는 세계열강의 군함들이 기웃거리기 시작하고 군내에는 개화의 바람이 일면서 기독교가 늘어나고 민란이 각처에서 일어나면서 민심이 뒤숭숭해졌다.
   1836년 12월 고종이 등극하고 이하웅 대원군이 정권의 일선에 나섰다.
   1864년 완도해역의 소안도에 수군진을 설치했다.
   1866년 외양선의 잦은 내침에 대비한 척사윤음이 반포되었다.
위기가 올 때마다 전란에 휩쓸려온 진도군은 남해연안의 인후지지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종3품관을 배치하는 도호부로 승격했다.
   일단 유사시에는 진도부사가 영광, 어란포, 이진포, 남도포, 금갑포, 마도 등 9개 수군만호부를 지휘하는 군지휘권을 부여했다. 이와 더불어 그 동안 진도군에 속해있던 영암군 시종면에 있던 명산면, 해남군 삼산면에 있던 삼촌면 외에 해남군의 화원면을 진도부에 소속시키고 지산목장과 해남 화원목장의 관할권을 강화하도록 했다.
   진도부는 1847년 다시 원상을 회복시켰으므로 그 기간은 8년간에 그친 셈이다.

◇ 1906년 9월 24일 조선초 초기에서 진도군에 속해 있던 명산면은 영암군 시 종면에, 삼촌면은 해남군 삼산면에 넘겨주고 현재의 행정구역 형태가 완성 되 었다. 물론 1903년 진도군에 속에 있던 지금의 신안 도초도와 안창도, 기좌도가 독립면으로 진도군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 무안군에 넘겨주었다.

◇ 1914년 일본식민통치자들에 의해 행정구역 개편이 이뤄질 때 고군, 군내, 임회는 각각 고일면(古一面), 고이면(古二面)등으로 각각 1, 2면으로 나뉘어 있었고 의신면에는 명금면(明今面), 조도에는 가사도면(加沙島面)이 따로 있던 것을 합하고 그동안 목장면(牧場面)이라 부르던 면 이름은 지산면(智山面)으로 부내면(府內面)은 진도면으로 각각 이름을 바꿨다.

◇ 1963년 조도면 마진도(馬津島)를 신안군 장산면에 주고 1983년 조도면 만재도와 고사도, 평사도, 송도를 신안군에 넘겨주었다 대신 신안군 장산면 저도를 진도읍에 편입했다.

◇ 진도면이 읍으로 승격된 것은 1979년 5월1일이다.




  근세한국오만분지일지형도 중 진도읍 부분(조선총독부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