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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 게시판의 "살랭이 놀이" 내용입니다.
제목 살랭이 놀이
작성일 2015-04-30 13:18:35 (최종수정일 : 2015-04-30 14:32:03), 관리자 조회수 268 회
1. 살랭이 놀이 개요
 
  살랭이 놀이는 진도지방에만 전승되어 내려오는 민속놀이이다. 살랭이 놀이란 옛날 어른들이 술방치기, 혹은 엽전 내기 등을 할 때 오늘날과 같이 도박성을 띈 놀이가 아니고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순수한 오락놀이로써 겨울이나 여름철의 여가를 즐겼던 남자들만이 하는 놀이이다. 이 살랭이 놀이는 해학적인 많은 가사가 있음이 다른 화투나 투전, 마작 등과 같이 도박성이 강한 놀이들이 아님이 증명되며 일종의 ‘추렴’정도에서 그친 민속놀음이다.
유식한 사람은 사설내용에 문자가 많았고 서민은 서민에 알맞은 사설을 부르며 어깨춤을 추며 놀음들을 하였는데 바람기가 있는 사람은 역시 바람기가 있는 사설로써 노래를 불렀다 하며 얼마나 흥겹게들 노래를 불렀던지 한마을에서 두, 세곳만이 놀음이 벌어졌다 하면 온 마을이 떠들썩 했다하며 이 놀이는 구성진 가락에 농한기의 무료를 달랜 농민들의 유희였다고 보아진다.
이 놀이의 방법은 상평통보 스물일곱닢(27개)와 목침 한개, 그리고 노인들이 팔에 끼는 ‘토시’를 가지고 4명이 한데 노는데 상평통보 배면에 새겨진 숫자 1부터 7까지는 세닢, 8부터 10까지는 각각 두닢으로 모두 엽전 두돈칠푼(27개)을 가지고 노는 놀음이다.
 
‘살랭이’라는 말의 어원은 놀이의 방법을 통해 추측컨대 상대방의 숫자를 죽이는 놀이, 다시 말해 ‘살(殺)하는 내기놀이’ 즉 ‘살+내기’로 이 ‘살내기 놀이’가 살랭이 놀이로 되었다는 설(지춘상)과 자기가 가지고 있는 숫자를 ‘살리기를 내기하는 놀이’, ‘살(生)+내기’ 즉 살리기 놀이가 살랭이 놀이로의 전음(轉音)이 아닌가 설명하고 있다.(정익섭)
『민속의 고향』(1975) 및 『전남의 세시풍속』(1988)에 진도 살랭이 놀이는 동철(銅鐵)인 상평통보 배면에 새겨진 숫자를 서로 잡아 죽이는 놀이로 ‘살(殺)+내기’가 살냉이라는 과정을 밟아 이루어진 말로 본뜻은 서로 죽이기를 내기하는 놀이로 기록되고 있다.
이 살랭이 놀이는 1975년 의신면 거룡리 박종언(朴鐘彦, 당시 92세), 청룡리 이덕순(李德淳, 당시 84세), 옥대리 김상윤(金相允, 당시 78세), 진도읍 성내리 정승한(鄭承漢, 당시 66세), 동외리 정준현(鄭俊鉉, 당시 83세), 교동리 박원재(朴源在, 당시 74세)씨 등의 증언과 재현으로 전남대 지춘상, 정익섭 교수, 그리고 조담환 전 진도문화원장에 의하여 처음 발굴되었으며 1975년경 KBS 1 TV에 의하여 이 놀이가 방영되기도 하였으나 이 놀이의 기능보유자들이 당시에도 모두 노령으로 부활시키지 못하고 타계함으로써 지금까지 이 놀이가 재현되지 못하고 잊혀져 오다시피 하였고, 현재는 살랭이돈 27닢을 보관하고 있으며 놀이에 직접 참여하였던 분으로 진도읍 교동리 박원재 옹(93세) 한분만이 생존하셨었다.
 
1976년 발간된 『진도군지』(편자 곽충로)에

‘진도살랭이놀이’는 현재 75세 이상되는 노인들만이 알고 즐기던 놀이로 이 노인들이 돌아가시면 잠적할 우려가 깊은 놀이이다. 어떻게 살리고 전승할 수 없는지 아쉬운 선인들의 놀이이다.
현재 우리 농촌에 남아 있는 내기놀음을 보면 투전이나 골패들과 같이 도박성이 강하고 살랭이 놀이처럼 유희성이 희박하다. 살랭이는 도박성이 없는 모두가 즐거운 놀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를 찾아볼 수가 있다. 현재 사라져가는 진도살랭이 놀이는 고유한 민속보존이라는 점에서 노래정리와 놀이의 전승책이 아쉽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76년 당시에도 이 놀이의 전승의 어려움을 아쉬워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1975년 이후 이 살랭이 놀이는 어디에서도 재현된 바가 없이 잊혀져 오고 있다.
 
 
○ 살랭이 놀이 유래
 
‘진도살랭이놀이의 연원과 유래도 그 기록이 없어서 알 길이 없다’고 『민속예술사전』(1979)에 기록되어 있음을 보면 그 유래가 확실하지가 않다. 그러나 이 놀이는 삼별초 전란시 몽고에 끌려갔던 진도의 주민들이 16년만에 돌아오면서 몽고 또는 만주지방에서 배워가지고 돌아와 전파 계승되고 있다는 주장과 또는 저 멀리 백제시대의 유산이 남아 있다고도 하며 이 놀이는 상평통보 엽전을 가지고 노는 놀이라는 점에서 상평통보가 널리 보급된 조선 숙종 4년(1678) 이후에 발생된 놀이로도 보고 있다.
1975년 살랭이 놀이를 조사한 송정연(당시 전남일보 기자)씨는 「민속의 고장」(전매 1975)에서 진도 살랭이의 유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진도라는 지방은 지리적, 역사적인 특수한 요인을 안고 있다. 고려 원종 12년(1270) 강화도에서 진도로 내려온 삼별초군은 진도에 관부(官府)를 설치하고 궁궐을 세우며 강국 몽고에 대항하며 제주, 충청, 전라, 경상도 일대를 장악하고 9개월여 동안 항쟁하다 여몽연합군에 함락, 이곳에서 살고 있던 주민 1만여 명이 포로로 몽고에 끌려가 억류되어 있다 16년만에 도과와 살면서 대륙문화, 그리고 유배지로서 내륙문화와의 영합, 섬으로서의 지리적 요건 등의 특수성을 들 수 있다.
삼별초난이 계기가 되어 들어온 대륙문화는 전래의 진도문화를 압도할 만큼 일반화 된 것은 아니었겠지만 진도지방 문화성격의 결정에 있어 중요한 요인이 되었을 것임은 주목해야 할 점일 것이다.
따라서 현재에도 이러한 역사적 사실로부터 전승되어 오는 것으로 보이는 놀이가 진도지방에 전하여 오고 있는데 그 좋은 한 예가 진도살랭이 놀이이다.
진도읍 동외리 정준현(鄭俊鉉, 당시 83세) 할아버지에 의하면 진도 살랭이는 삼별초난 때 몽고군에 의하여 끌려갔다 돌아온 주민들이 중국에서 배워가지고 돌아와 전파시켜 오늘에 이른다는 이 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살랭이 놀이의 전래설을 밝히고 있다.
 
또 하나의 설은 진도살랭이 놀이는 상평통보를 놀이기구로 사용하고 있으므로 이 주화(鑄貨)를 통해서 그 성립 년대를 추측해 보면 숙종 4년(1678) 이후가 아닌가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것은 상평통보가 처음으로 주조된 연대는 인조 11년(1634)이고 그 사용은 효종 2년(1656)에 서울과 서부지방에 한하여 사용되었었다. 그 후 민간에 널리 사용된 것은 초주(初鑄)로부터 44년 후인 숙종 4년이었다. 이렇게 볼 때 이 놀이가 형성된 상한년대를 숙종때까지로 소급할 수가 있겠으나 이곳에서 불리어 지는 노래의 가사내용을 살펴보면 각설이타령, 수요(數謠), 투전타령, 화투타령 등의 민요가 많이 혼합, 통용되고 있으므로 이 놀이의 발생은 훨씬 그 후대로 추정하기도 한다.
살랭이 놀이는 강원도와 경상북도에서는 사시랭이 놀이라는 명칭으로 전승되고 있고 진도에서는 살랭이 놀이로 불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