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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 게시판의 "서외 도깨비굿" 내용입니다.
제목 서외 도깨비굿
작성일 2015-04-30 11:56:54 (최종수정일 : 2015-04-30 14:30:59), 관리자 조회수 300 회
1. 서외리 도깨비굿의 역사
 
  진도는 조선초 90여년의 공백기 이후 1437(세종19)년 설군 되었는데 이때 여제단을 비롯한 각종 단이 마련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여제단은 성황단, 사직단과 함께 각 현단위에 까지 설단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동국여지승람』(1486년) 기록에 이 세 곳이 모두 나온다. 조선시대에 규정된 예법에 보면 성종대에 길례중 소사(小祀)로 인귀(人鬼)에 대한 제사로서 각군현에서 지내도록 하고 있다. 이 여제는 크게 세 종류로 본래적 의미에서의 여제, 즉 다양한 사유로 죽은 제사 지낼이 없는 원혼들을 포괄적으로 달래기 위한 제사, 전염병으로 죽은 원귀들을 달래어 전염병을 퇴치하기 위한 목적으로 거행하는 여제(癘祭), 전쟁이나 사고로 한꺼번에 죽은 사람들을 위한 제사가 그것이다. 초기의 여제는 1년에 3회 제사하도록 했는데 봄에는 청명(4월 5일), 가을에는 7월 15일, 겨울에는 10월 1일이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서 한말 고종대에 이르면 여제의 의미가 퇴색하여 매년 10월 1일에만 제사를 지내고 있어 궁내부에서 청명일과 10월 1일 두 차례 지낼 수 있도록 왕에게 청하여 그대로 따르도록 했다. 조선후기에 관료중심의 여제가 약화되고 있음은 그것이 민간의 것으로 전용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러한 예가 바로 진도읍 사정리의 거리제에 있고 일정 기간 행해졌을 거라는 점이다. 그러면 왜 다른 부락이 아니고 사정리인가 하는 것은 여제단위치와 그것이 속한 중심마을이라는 이라는 점과 여제를 주도적으로 보조하던 마을이었을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진도에서 도깨비굿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그 뿌리가 여제에 있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여제의 역병을 물리치는 기능이 도깨비굿에 습합된 것인지 아니면 이와 별개로 도깨비굿이 존재했었는지는 확인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여제라는 것은 최하 현단위 한곳에서만 행하던 것이고 진도의 도깨비굿은 치소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발견된다는 점에서 아마도 공동체단위의 퇴역굿으로 동시대에 존재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진도에는 도깨비굿이 서외리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여러 곳에서 행해졌는데 군내면 월가리, 군내면 용장리, 군내면 연산리, 조도면 가사도 등이 그것이다. 가사도를 제외하면 지금 남아 있는 도깨비굿은 여역(癘疫)을 물리치는 퇴역굿의 성격이 강하다. 즉 진도 서외리 도깨비굿은 퇴역굿의 형식으로 존재하였으나 여제의 퇴행과 함께 여제의 형태와 기능 일부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현재의 모습이 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즉 현재 도깨비굿이 연행되는 것은 여제와 도깨비굿이 결합된 형태라 할 수 있다.
  실제 마을에서는 지금은 없어진 우물에서 굿을 시작하여 마을 한바퀴를 돌고 난 뒤에 ‘사짓등’에서 굿을 끝내는데 이 사짓등을 ‘도깨비바우’라고도 한다. 사짓등에 대비되는 지명으로 ‘여짓등’이 있는데 이곳을 ‘여자도깨비’라고 하고 도깨비바우가 있는 사짓등을 ‘남자도깨비’라고 한다. 이것은 사직단과 여제단이 있는 등성이라는 뜻으로 ‘사짓등’에는 사직단이, ‘여짓등’에는 여제단이 있었다. 도깨비바위가 있는 곳은 서외리에서 송현리로 넘어가는 고개 중간으로 서외리 외곽에 해당한다.

2. 서외리 도깨비굿의 내용
 
  진도 서외리의 도깨비굿은 각 마을에서 부녀자들만이 밤에 하는 굿으로 음력 정월 보름부터 굿을 시작하여 집집마다 돌면서 굿을 친 다음 여제각(厲祭閣)에서 제를 지내고 귀신들을 가둔다. 이때의 제관은 깨끗한 남자를 골라서 행하며 9월 9일 중구날에는 문을 열어 가두었던 귀신들을 풀어준다.
이 도깨비굿은 남자들이 절대로 보아서는 안되며, 부락의 부녀자들이 전원 참석해야 하고 굿치는 것을 거절해서는 안된다.
 
도깨비굿을 칠 때는 부인들이 각자 가면을 만들어가지고 나오거나 가면이 없는 사람은 숯을 얼굴에 칠하고 나온다. 또 각자 소리나는 물건을 하나씩 들고 나오는데 놋양판, 놋그릇, 바가지, 냄비뚜껑, 솟뚜껑, 식기, 주전자, 양지기, 새숫대야, 징, 북, 꽹과리 등 가지 각색의 소리 나는 물건을 들고 나온다. 그 중 질그릇 깨진 것과 통제비(변소 빗자루)는 꼭 준비한다. 피속곳(월경이 묻은 속옷)을 장대에 매달아 든 사람이 앞장을 서 가까운 곳부터 굿을 시작한다.
 
도깨비굿 패가 요란하게 굿을 치고 대문에 들어서면 주인(부녀자)은 이를 맞이하여 마루에다 짚을 깔고 쌀(액쌀)과 정화수를 떠 놓는다. 그러면 굿패들은 “마귀야 물러가라”, “마귀 쫓자”등을 외치며 둥근 원을 그리며 도깨비 춤과 같은 즉흥무를 추며 몇 바퀴 돌고 이어서 마루에 있는 성주상을 향해 기물을 두드리면서 세 번 절을 한 다음 대표는 이른바 축문을 읽어 내린다.
 
 
자강 자강 신미귀
두여우 슬벽
귀도 피지선 해야
원형이정은 천도지상
인의여지는 인성지강이라
넘차 골초는 무의불선하여 애연사러니
수감이 형현이라
 
 
축문을 읽고나면 쌀을 집어서 사방으로 “사파쉐~”하고 뿌리며 소금도 뿌리고 피마자대를 구석구석 휘저으며 이렇게 해서 이집에서 굿은 끝난다. 마지막 날 저녁에는 집집이 거둔 쌀로 밥을 하고 동리 입구로 굿을 치고 나가서 귀신들을 대접하는 제물 12접시를 차리고 제를 지내며 축귀문을 읽는다.
 
逐鬼文(축귀문)

元亨利貞 天道之常
 
 
원형이정은 변하지 않는 하늘의 도리이고
*元亨利貞: 易理에서 말하는 天道의 네가 德, 곧 사물의 근본원리를 이름. 봄 여름 가을 겨울, 仁 義 禮 智
仁義禮智 人性之綱
 
인의예지는 인간성품의 근본이다.
*人性之綱: 人道의 대본, 인륜의 綱紀.
天地之間 人爲最貴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이 가장 귀하고
迷暗之間 神爲最靈
 
어두운 곳에는 신이 가장 신령스러우며,
*迷暗: 깨닫지 못하여 어두움
自南正屬 神之後라 자고로 남녘의 올바른 풍속은 신의 다음이라

邪不犯正
妖不勝德
바르지 못한 것은 바른 것을 감히 범하지 못하고 요사스러운 것은 덕을 이기지 못하니
聖人已歿 陰陽失序 성인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음양은 질서를 잃어서
邪鬼妖神 作弊人間 사악하고 요사스런 귀신들이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니
非鳴橫死者 比比有之 비명횡사자가 자주 있네.
汝等罪惡 九天難逃 너희들은 죄악으로 구천에서 어렵게 떠다니며
*汝等: 너희들, 그대들. 難逃: 어렵게 떠다니는 것.
鬼敢所犯 古今我將 受天命 요괴들이 감히 범하는 바 예나 지금이나 우리가 장차 천명을 받아
 
收率 汝等 上爲祭 너희들을 거두어 제사를 지내노라.
庭下 爲地獄 一無遺漏 뜰 아래 지옥에 하나라도 빠짐없이
速去千里 遠去萬里 어서 멀리 가거라! 멀리 멀리 가거라!

  축귀문이 끝나면 둥그렇게 원을 그리며 마지막 한바탕 굿을 친 다음 마을 반대방향으로 일동이 절을 하고 제가 끝나면 볏짚으로 싸서 한곳에 제물을 비우며 각자 가져온 가면들은 불에다 태워버리고 소리나는 물건들은 불에 씌우고 홀몸으로 불을 넘어서 그때부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뒤도 돌아보지 말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해서 도깨비굿은 끝내고 목욕재계한 남자제관 두 사람이 모은 귀신을 여제각으로 인도하여 거기서 돼지머리로 상을 차리고 간단한 제 절차를 통해 떠돌이 귀신들을 가두게 된다. 그 귀신들은 ‘총알 맞아 죽은 귀신, 작두에 목 짤려 죽은 귀신, 턱 떨어져 죽은 귀신, 객사 귀신, 야챕이 귀신(키가 큰 귀신), 물에 빠져 죽은 귀신, 덜다리 총각 귀신(장가 못간 귀신), 심 앓아 죽은 귀신(마라리아 병), 멍두리 귀신(시집 못간 귀신), 염병 앓아 죽은 귀신, 목매달아 죽은 귀신, 지랄병하다 죽은 귀신, 무자 귀신(아이가 없는 귀신)’이다.
제관들은 마지막 ‘무자 귀신’하고 문을 닫는다. 그리고 음력 9월 9일 중구날에는 농사를 다 지었으므로 제관들이 이곳에 찾아와 그 귀신들을 풀어 자유롭게 해 주는 것이다.

3. 서외리 도깨비굿의 특징
 
  진도 서외리 도깨비굿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여성주도의 제전이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여제와의 습합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진도 서외리 도깨비굿은 부녀자들이 주도하는데, 진도군의 도깨비굿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왜 유독 진도에서만 이런 특징이 나타나는지는 따로 고찰해야 할 만큼 쉽게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조도면 가사도의 연구사례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수긍은 할 수 있으나 진도읍 서외리 사례에 정확히 부합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적용에 있어 신중해야 한다.
 
  가사도의 사례를 보면, 먼저 정월 그믐 자정을 넘겨 동구 앞에 제상을 차린다. 다음날인 2월 초하루부터 가사도의 모든 여성들이 모인다. 이들은 첫째날과 둘째날 이틀동안 각각의 집들을 돌아다니며, 굿을 하게 된다. 진행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월경이 묻은 속곳이다. 이것을 선두에 선 사람이 장대에 꼽고 대열을 인도한다. 물론 남자들이 얼씬도 하지 못한다. 굿에 쓰인 용품은 초기에는 놋양판, 쟁반, 냄비뚜껑, 나무 막대기, 양철동이, 놋그릇, 바가지, 솟뚜껑, 식기, 주전자, 양지기, 세숫대야 등을 사용했지만 점점 북, 장구, 징 등의 국악기를 병행하였다. 만약 도중에 남자를 보게 되면, 막대기로 때려서 내쫓는다.
이렇게 이틀 동안 가가호호 방문하며 액귀를 몰아내고 나서 3일째는 “낸다”고 하여 모두 한곳에 모여 질펀하게 논다. 이날은 각 집에서 술이나 밥, 과일, 돈 등을 분수에 맞게 내놓는다. 이날은 또한 깨끗한 여자 한 명이 목욕재계하고 음식을 장만한다. 깨끗한 여자는 당제와 마찬가지로 자식이 없는 여자나 혼자 사는 여자를 이른다. 저녁 무렵까지 한바탕 놀고 나서 마을 어귀에 모여 마을을 보며 절을 하는데, 이것을 “도깨비가 절하고 나간다”고 한다. 이후 어류포로 가서 나무로 깎아서 만든 배에 액을 실어 보내는 것으로 도깨비굿이 모두 끝난게 된다.
 
나무배는 대나무 돛대를 꼽고 종이 돛을 단다. 이후에는 나무로 배를 만들지 않고 바가지를 이용했다고 한다. 나무배에 액을 실어 보내면서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두드려 대던 삼채가락을 이용해 주문을 다음과 같이 왼다.
노래: 병과 잡귀는 몰아내고 님과 복은 쳐 들이자
가락: 꿍자 자자꿍 쭝자자꿍 꿍짜 자자꿍 꿍자자꿍
노래: 갈라믄 가고 말라믄 말고 조도로 갈라믄 조도로 가고 진도로 갈라믄 진도로 가고, 느그 알아서 떠 나가라
가락: 꿍자 자자꿍 쭝자자꿍 꿍짜 자자꿍 꿍자자꿍
 
이것은 서외리 도깨비굿에서 축문을 읽는 것과 대조적이고 또 서외리 도깨비굿은 가면을 쓰는데 가사도는 쓰지 않는다. 그리고 굿을 친 다음 여제각에서 제를 지내는 것과 이때의 제관을 남자를 골라서 행하는 것도 다르다.
하지만 서외리 도깨비굿에서 처럼 가사도 도깨비굿도 방귀(병의 일종으로 보임)같은 것이 걸리면 도깨비굿을 하였다고 하는 점에서 두 도깨비굿은 일종의 축귀굿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여성 전유의 반란적 제의라는 측면에서는 동일한 지향점을 가지고 있다.
민요사회나 경제적 구조 속에서도 도서지역의 여성은 특성을 지니고 있다. 육지와 다르게 논농사를 전담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고 일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역시 내륙지역과는 다르게 거의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다라고 하는 생업공간을 전담하는 남성과, 집이라고 하는 삶터의 공간을 전담하는 여성 역할의 생태적 분담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서외리 도깨비굿에서는 전형적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없으나 가사도 도깨비굿에서는 확실하게 나타난다. 서외리도 소포둑을 막기 전까지 바다와 가깝기는 하였지만 마을 남성들이 모두 바다일에 전념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서외리 도깨비굿이 가사도와 다른데에는 여제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진도 서외리 도깨비굿의 두 번째 특성으로 여제와의 습합을 말할 수 있는데, 여제는 앞서 설명했듯이 조선 초에 수용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여제가 조선 전기에는 기록에도 많이 나타나지만 후기로 갈수록 관련기록이 줄어들고 여제단이 황폐해 졌다는 상소나 매년 1회에만 여제를 지낸다는 궁내부의 지적으로 볼 때 조선후기에 걸쳐 한말에 이르면서 여제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보면 유교 및 관료 중심의 여제가 약화되고 민간으로 이양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실제 강원도의 예에서 성황이 고려시대에 수용되어 조선시대에는 현 단위까지 범국가적으로 지내던 제사였으나 강원도지역에서는 토착적인 동제로 전용되어 민간신앙화 되었다. 중국의 지역수호신인 성황이 우리 나라 민산에 수용되면서 동제신이 됨으로써 그 기능을 유지하는 일련의 문화접변현상은 전라도지역의 조왕(竈王)역시 마찬가지이다.
 
원시종교, 민간신앙, 민속종교 등으로 불리는 자연종교는 기능적 기원이 그렇듯 필요를 느끼기만 하면 언제든 또 어느 것이나 포용해서 자기의 것으로 습합시켜 버리는 태도 때문에 개방적인 속성으로 대표된다.
 
여제를 정착시켰던 유교사상이 조선조 후기에 와서 실학에 의해 대체되었고, 거기에 후기의 특성 중의 하나인 사회적 다변화의 영향이 가미되어 조선 초 규식적인 의례가 여러 모로 변화되었을 것은 자명하다. 여제에 대한 조선조 후기의 기록들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증명해주는 사례로, 한말 고종 때 여제가 근본 의의를 크게 상실하고 있다고 지적되고 있는 것은 바로 유교적인 제례로서의 여제가 민간에 수용되면서 변화시켰을 가능성을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서외리 도깨비굿은 이러한 시대상황과 맞물려 여제가 마을단위의 제전에 수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제는 원래 다양한 사유로 죽은 제사 지낼이 없는 원혼들을 포괄적으로 달래기 위한 제사와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들을 달래고 전염병 퇴치를 위한 제사, 전몰자를 위한 제사 등 주로 원혼을 달래고 전염병을 퇴치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 이것이 진도 서외리에서는 농경사회와 만나면서 농경의례적으로 변하였는데, 그 근거가 되는 것이 농사가 시작되면 여귀를 가두고 끝나면 풀어주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도작문화권에서는 정월 대보름이 신년의례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서외리 도깨비굿은 정월 대보름에 여제단에 잡귀를 가둔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또한 무자귀가 대표적인 귀신으로 불리는데, 무자귀란 자식 없이 죽은 귀신이다. 자식 없이 죽었다는 것은 대가 끊겼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자식을 낳지 못했다는 말이다. 자식을 낳지 못했다는 것은 생산을 하지 못했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어 농경과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서외리 도깨비굿에서 농사가 시작될 때 무자위(無子位)를 가두어 두는 것은 농경기에 그들이 활동함으로써 생산활동을 방해할까 함이요, 농사가 끝나고 나서 풀어준다는 것은 그들이 더 이상 방해할 요소가 없어진 다음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진도 서외리 도깨비굿은 원래 방역굿의 형태였으나 유교식 관료주도의 여제가 제 기능을 상실하고 의미가 약해지면서 여제와 습합되어 동제격인 농경의례로 굳어진 것이라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