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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 게시판의 "덕병 장승제" 내용입니다.
제목 덕병 장승제
작성일 2015-04-30 14:13:24 (최종수정일 : 2015-06-29 16:36:45), 관리자 조회수 447 회
1. 덕병마을 개관
 
원래 덕병리는 덕저리, 떡저리, 또는 덕병이라고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건너편 금골산 남서자락의 용인리와 달마산 건너편의 한의리를 합쳐서 법정리명인 덕병리로 병합했다. 그러나 장승이 서있는 마을로 당산제를 모시는 곳은 바로 석장승이 있는 덕병마을이다. 1400년경 처음 마씨가 시거했고, 그후 밀양 손씨들의 증손들이 들어와서 퍼졌으며, 경주 최씨, 신안 주씨도 입도했다는 기록이 있다.
진도 몸섬의 서북방에서 가장 큰 마을인 군내면 덕병리는 2001년 7월 현재 87호 183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그러나 1983년에는 55명이었던 점으로 미루어 진도 인구가 110,351명이던 69·70년대에는 6백명이 넘었을 것으로 보인다.
마을 주민들은 해마다 6월 1일에 충제를 모셨으며 6월 15일 진도에서 유일하게도 원둑제사를 모셔 용왕님과 토지신께 원둑의 보호와 풍년을 기원했음은 원둑 파손에 따른 피해경험과 더불어 농지보전을 그만큼 염원했던 현상으로 파악할 수 있겠다. 또 부녀자들은 마을단위 제액행사로 도깨비굿을 쳐 마마를 비롯한 전염병을 예방코자 했는데, 옆 마을 연산리에서 1992년 정월 대보름날 밤에 도깨비굿을 했던 점은 덕병리에서는 이미 사라져버렸지만 이 일대의 전통 민속자료로서 의의가 컸다. 마을 해변에 조성된 소나무 숲인 속칭 ‘솔목거리’의 소나무에는 아기의 시체를 오쟁이에 담아서 가지에 매달았던 풍속을 마을 노인들은 지금도 잘 기억하고 있다.
장승류의 제액(除厄)신앙 상징물은 마을 입구에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나 덕병리의 경우 서북방 해변에 세워 진도 전역 또는 북부지역의 살(煞)을 진압코자 하는 진살(鎭煞) 의지를 보여준 것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장승이 서있는 해안 돌출부인 ‘진살등’ 지명은 장승을 세우면서 붙여진 이름으로 볼 수 있다.

 
2. 장승과 장승제
 
마을입구에 사람형상으로 서서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재액(災厄)을 막아 마을을 지키면서 이정표 역할까지 해주는 장승(長栍)은 그 명칭이 대개 경기, 충청 등 중부 지방에서는 장승, 영남지방은 벅수, 제주도는 하르방인데 비해 호남지방은 할아버지, 할머니로 더욱 인격화 하고 있다. 또 중부지방은 목장승이, 호남, 영남, 제주에는 석장승이 많으며 벅수, 솟대, 입석, 남근석 등과 함께 마을 수호신으로서 동제(洞祭)의 신체(身體)로 모셔지고 있다.
이같은 전통 민간신앙과 함께 마을 또는 사찰의 경계를 알려주고 땅의 기운을 북돋아 주는 장승에 새겨진 글은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 동방축귀대장군(東方逐鬼大將軍), 서방백제대장군(西方白帝大將軍), 천상천하축귀대장군(天上天下逐鬼大將軍), 동서남북축귀(東西南北逐鬼), 상지주장군(上之周將軍), 하지당장군(下之唐將軍), 신호동장군(神護東將軍) 등의 내용이다.
동제에 포함된 절차로 모셔지는 장승제는 동신(洞神)의 하위신으로 제의 마지막 순서에 해당되며 충청남도지방은 윤달이 드는 해에, 경기도는 3년마다, 남부에서는 매년 제를 올리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1) 덕병마을 석장승


덕병마을의 북동쪽 바다로 통하는 길목인 진살등에 서 있는 석장승. 왼쪽이 ‘대장군(大將軍)’, 오른쪽이 ‘진제등(鎭祭嶝)’이다.

 
덕병마을에는 언제 세운지 모르지만, 두 주의 석장승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것들을 장성이라고 불러왔다. 동쪽에 서있던 장승의 가슴에 “대장군(大將軍),” 서쪽에 서있던 장승의 가슴에 “진상등(鎭桑嶝)”이라는 한자가 음각되어 있었으며, 진상등장승의 뒤쪽에는 “장성(長城)”이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었다고 한다. 여기저기에 사진들이 많이 남아 있어서 그 풍모를 알 수 있는데, 이종철은 이들을 다음과 같이 매우 사실적이며 실감나게 묘사한 바 있다.
“서쪽 대장군은 화강석으로 높이 140㎝, 둘레 123㎝, 동쪽 진상등(鎭桑嶝)은 높이 195㎝, 둘레 약 130㎝였다.
대장군은 두부(頭部)에 16㎝ 높이의 탕건(宕巾) 형상의 관을 쓴 듯 표현하고, 폭 30㎝, 높이 11㎝의 이마에는 주름이 없고, 눈은 얕은 선각으로 감고 있는 듯하고, 코는 두툼하면서도 세모난 칼날 코, 귀는 부처님 모양 귓볼이 축 늘어지고 입은 선각으로 웃은 입, 이빨은 표현이 없고, 턱은 방방한 둥근 턱으로 목은 5㎝로 짧으며, 주름이 없다. 손과 발, 몸체 부분은 명확한 표현을 하지 않았으나 어깨에서 팔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앞면 뒷면을 도드라지게 조각하였고, 풍겨주는 느낌은 인자하고 근엄한 얼굴이다. 조형면에서 볼 때 전체적으로 중량감을 느끼게 하는 장방형 사다리꼴로, 섬세한 조각술보다는 순박한 농민의 신앙심을 불어넣은 작품이라 하겠다.
서쪽의 진상등(鎭桑嶝)이란 각자(刻字)가 있는 여장성은 머리에 관이 없이 높이 13㎝, 폭 38㎝의 훤칠한 긴 이마와 두드러진 눈썹을 가졌으며, 눈은 쇠눈처럼 크고 둥그렇게 튀어 나왔다. 코는 역시 세모난 칼날 코이며, 귀는 눈썹 부분에서 코에 이르기까지 길게 늘어져 있으며, 입은 선각으로 웃는 형태이다. 이는 드러내놓지 않았고, 턱은 둥글고 방방하며, 목은 5㎝이나 삼도(三道)는 없다. 목에서 어깨에 이르는 부분은 거의 곧은 선으로 나타냈으며, 팔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의 가슴 쪽을 목과 같은 높이로 각지하여 하반신에서 갈라진 수염을 표현한 듯한 여덟 팔자로 음각문자를 새겼다. 전체적으로 방형의 사다리꼴을 연상케 하는 동체는 지금 30㎝의 화강암 석인으로 장성 목에 걸어둔 왼새끼 금줄의 소 아가리 턱뼈는 어떠한 액살도 씹어서 내뱉을 모방주술을 표현함으로써 ‘건살뫼’의 멋을 한껏 부풀게 하고 있다.”
1989년 어느날 아침 마을 사람들은 깜짝 놀랬다. 장승이 서 있던 곳이 허전해보였다. 밤사이에 마을을 지켜주던 석장승 두 기가 도난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부근에 차를 받혀두고 중장비를 동원해서 장승을 뽑아 가버린 것이었다. 남도문화재에 이 마을의 망제가 출연을 한 적이 있었는데, 장승을 도난당한 후 2년간은 그때 만들어서 사용했던 목장승을 임시로 세워두고 제사를 모셨다. 하지만 본래의 장승이 없어지고 나서 그해부터 마을에서 젊은 사람이 죽어나갔고 정신이상자가 생기는 등 좋지 않은 일들이 생겼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협의 끝에 1991년 마을자금 4백여만원을 들여 다시 현재의 석장승을 준비하여 예전에 있던 자리에 대신 세우게 되었다.

 
2) 덕병마을 장승제


사진출처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진도에서 동제는 정월대보름, 정월 3일, 2월 1일 등에 모셔지는 가운데 덕병마을 장승제는 절차제에 해당된다. 따라서 덕병마을 장승제는 원래 동제에 포함된 내용이며 덕병리 동제의 장승이 차지하는 특성 때문에 대외적으로 『덕병리 장승제』라 알려지게 되었다. 이 장승제가 널리 알려지는 데는 이종철 전 국립민속박물관장의 역할이 뒷받침 되었다. 그는 1982년 현지조사를 통해 「진도 덕병리 장성의 거랫제 연구」를 1984년 이두현 박사 회갑기념 논문집에 소개했다. 논문은 덕병리의 문화인류학적 고찰과 장승제 세부진행을 정리해 민속학계의 관심을 끌었고 뒤따른 조사자들의 길잡이가 되었다.
덕병마을 동제에서의 장승제는 장승의 위치가 모든 장승들처럼 동구에 있지 않고 마을위 차도에서 500여 미터 떨어진 바닷가에 있는 점이 제(祭)의 성격을 파악하는데 단서로 되고 있다. 즉 살방(煞方)인 진도의 서북방 해변 진살뫼에서 넓은 바다를 향해 소 턱뼈를 목에 걸고 서서 바다를 통해 들어오는 외부재액을 막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덕병마을의 시거(始居)년대를 1440년 쯤으로 즉, 진도가 왜구의 폐해를 모면코자 1350년 영암땅으로 이사했다가 87년 만에 다시 돌아와서 살기 시작한 것과 같은 시기로 볼 때 이 석장승은 다시는 왜구의 피해가 없기를 기원하면서 진도의 평온을 누리게 하는 역할을 맡았던 신앙물일 수도 있다. 그 당시 안목으로는 덕병마을은 마을 뒤 솔개재를 넘으면 옛날 진도이 중요 세력권이던 가흥 땅의 중심부가(정자리, 월가리, 상가리)나타나는 점으로 보건데 이 같은 신앙물을 세우기에 적합한 장소가 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