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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리 마을 옹기 가마터 이야기
작성일 2020-06-19 13:37:16, 관리자 조회수 24 회
우리 마을 옹기 가마터 이야기
 
하재주
 
 
고정리 494-289번지에 옛날에 옹기를 굽던 가마가 있었으나 지금은 텃밭으로 사용하고 있다.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김용호란 분이 객지에서 이사 와 처음 옹기를 굽기 시작했다.
1946년 해방 이듬해에 장창규 씨가 영암군 삼호면 망호리에서 가족을 이끌고 중매 마을에 정착하여 옹기 일을 이어받아 여러 종류의 옹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장 씨는 동권, 동용, 동옥, 동옥, 동현, 동원, 동천의 6형제 자식을 두었는데 장창규 씨는 본인과 동권, 동옥 두 아들만이 옹기 만드는데 참여했다.
그 당시 마을 주민 일부는 남자는 옹기를 지게에 지고 여자는 머리에이고 장터나 마을로 다니면서 장사를 하였다.
보통 옹기를 굽기 시작하면 2, 3일 주야로 불을 때는 데 옹기 가마터 앞에 토담 초가 공장 2동이 있었고 옹기에 유약을 발라 건조하고 있었다.
우리 마을 중매라는 지명은 쟁매[錚山(쟁산)]가 징매로 변하고 징매가 중매로 고정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이웃 마을 고산에서 북[鼓(고)]을 치면 이 마을에서는 징[錚(쟁)]으로 응하였다고 한다.
여귀산은 여자 기생이 노래하고 춤을 추는 형국이고 북, 징, 장고, 비파(명슬리)등 지명이 생겼다는 구절이 있다.
1700년경 진주 하 씨 하원 서가 임회면 삼막리에서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중매리가 속한 고정리는 본래 진도군 임회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길우리, 고산리, 매정리를 병합하여 고산과 매정의 이름을 따서 고정리라 하여 임회면에 편입되었다.
1956년 고산에서 분리해서 이장을 두었다. 주변에 높은 산은 없으나 대부분이 저 산성 산지의 완경사면을 개간하여 밭으로 이용하고 용산천의 배후 습지를 일제 초기 장구포 간척 후 논으로 경작하여 생활하고 있다.
광복 후까지 우리 동네 중매리 옹기가마가 유명했다. 1976년 호수가 46호 234명이 지금은 29집 60명으로 줄었다.
김씨 4집, 박씨 5집, 하씨 12집, 양씨 2집, 오씨 3집, 강씨, 소씨 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