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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게시판의 "군내면 세등마을에 서당을 세우게 된 배경과 훈장" 내용입니다.
제목 군내면 세등마을에 서당을 세우게 된 배경과 훈장
작성일 2020-06-19 13:32:47, 관리자 조회수 26 회
군내면 세등마을에 서당을 세우게 된 배경과 훈장
 
곽재상
 
서기 1800년대 초 (1800년~1830년경) 군내면 세등마을에 나이가 많은 학동들의 생활이 갑자기 문란해지기 시작하여 마을 어른들이 이를 바로 세워주려고 심한 야단을 쳐도 쉽사리 고쳐나가지 못하는 실정이었다고 한다.
이웃마을 송산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있었으나 가장 우선한 동네는 세등으로 동네 지도자들은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고 전한다.
 
1.서당이 중심이 되어 가르쳐야 할 사항 (사회적 배경포함)
 
① 학동들은 사람을 만나도 인사를 할 줄 모름
② 윗사람을 공경할 줄도 모르고 어른이나 아우를
사랑할 줄 모름
③ 효도할 줄도 모르고 순종의 미덕도 없었다고 함
④ 마을 인심도 순탄치 않아 노소(老少)의 순서가
없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생각이 달라
선후관계가 없고 미풍양속이 땅에 떨어져 겸손과 염치가 없고, 글자를 몰라 옳고 그름을 모르는
사례가 발생했다.
⑤ 이웃집에 중환자가 있거나 재해가 있어도
찾아볼 줄도 모르고 출산이나 사망 사례가 있어도 살펴보고 예의를 갖추어 위로하거나 구출할 줄도 모르는 사례가 발생했다고 전한다.
⑥ 이례적인 사항으로 학동들이 모이면 마을 골목을 옮겨 다니며 알아들을 수도 없는 소리를 고래고래 외치고 다녀 마을어른들은 눈살을 찌푸리고
대부분이 싫어하며 야단을 쳤다고 전한다.
 
그때쯤 사랑방에 모여 의논하던 어른들은 학동들의 못마땅한 행동들이 쉽사리 고쳐지지 않을 것이라 예감을 했다고 하며 동네 어른 중 누군가는 학동들의 잘못된 버릇을 잡아주고 인성이나 도덕을 가르쳐야 할 것이라고 하며 하루 이틀이 아니고 몇 달이 걸리더라도 차분하게 습관이 들도록 가르치고 성실하고 모범적인 학동이 되도록 주위에서 붙잡아 주는 훈장이 있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고 전한다.
또 공부할 장소도 마을에서 선정해주고 시설도 만들어주고 수업 중 이탈하는 이가 없도록 믿음성 있는 훈장을 선정해주어야 한다고 의견들이 모였다. 훈장 생활비는 동네에서 부담하여 해결해주고 훈장이 하는 일에는 관여치 않기로 협의가 되었다 한다. 학습장 소인 새로운 서당 터는 세등리산 124번지, 129번지, 130번지 연접 지점으로 정하고 동네 사람들이 우선 터를 다듬어 학습방을 짓기로 결의했다고 한다. 어른들은 가장 중요한 사항인 훈장 선발에 필요한 기준을 다음과 같이 책정하여 놓고 누구든지 가능성 있는 사람에게 훈장을 맡기기로 하였다.
 
2. 훈장 선발기준
 
① 평소 술을 마시지 않고 생활면에 밝은 사람
② 수업 중 질문을 받으면 빨리 답을 해줄 수 있는 사람
③ 학습 실력이 뛰어나며 평소 선생님 칭호를 받고 있는 사람
④ 학동들을 심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
⑤ 옳은 일에 학동들 편이 되어주고 보호해주고
학동들 의견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
 
2~3일 지난 후 동네 어른들은 사랑방에 모여 그간의 훈장 선발전을 놓고 토론하며 대상자 1인을 선발했다고 전한다.
 
훈장 대상자의 본은 진주요 성은 하 씨이고 자(字)는 치도(致圖)요 호(号)는 유암(牗庵)이다. 훈장 댁에 이미 연락되었고 서당 학습 개시 전 이웃 마을의 선례를 알아본 다음 천천히 준비하여 학습 시작에 임하자고 대화가 된 것이라 한다.
유암은 실제로 현장을 돌아본다는 의견이 있었던 것으로 전하며 이웃마을인 송산과 용장, 신리 등 3개 마을은 군내, 고군 양면의 선두가 되고 있다는 소감을 이야기한 것으로 전한다. 위에서 말한 몇 가지 사례들은 서기 1.800년(순조대왕)을 중심으로 전후 20-30(약50년)사이에 있었던 일로 추정해볼 수 있다. 다행히 세등 학동들은 마을어른들이 새로이 준비해주는 학습방에 들어가 적응이 잘 되고 사고가 없었다는 내용으로 마을에서 모두가 잘된 일로 칭찬을 했다고 하며 일부 농가에서는 자기 자녀의 교육에 도움 되어야 한다고 느끼고 논이나 밭, 일부를 서당 몫으로 희사하여 서당운영의 재원 마련이 되게 한 사례도 있었다고 전한다.
지금도 산골계곡에는 산골답과 밭이 (휴경, 폐경)있으나 입지조건과 사정으로 그대로 방치되는 논이 약 3,000평정도 있고 서당 제각주위에 1,000여 평의 밭이 있는바 약 700평은 작물을 재배하고 나머지 면적은 목적에 맞추어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헌데 유감스럽게도 유암선생의 생몰 연대의 기록은 없다. 유암선생가족일행은 (진양하씨 대동보 1984년 발간분) 본인(치도), 부친(취성), 조부(채징), 증조부 (응경-㒣鏡)등 네 분의 생몰 년대가 없었지만, 다행히 응경조위장형 응창조(㒣昌祖)의 생몰년대가 있어 이를 기준으로하여 (1대 30년)추산해본 결과 유암선생은 1692년경에 출생한 것으로 간주해볼 수 있으며 서당훈장이 될 정도의 실력을 연마하고자 하면 적어도 약 30년 이상 정도의 학습활동기간이 소요되어 훈장의 자리에 앉아서 일 한 시기는 대략 1820년(순조20년) 이후 일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이웃 동네인 군내면 송산 동네에서는 1800년 시작한 대동학계가 1927년에 정식으로 학계안이 작성되어 서당을 얻었으니 참고해 볼일이다.
 
3. 서당을 마을 가까이 옮긴 내용
 
마을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서 시작한 서당이지만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바뀔 때 즈음에는 서당 학동들이 강을 한다고 법석이 생기며 한편에서 즐겼다고 한다. 하 선생이 돌아가시고 서당에서 새로운 훈장이 나와 학습이 계속되었다고 하며 선생님 두분 과 서당에 논밭 납답자 3명을 의논 결정하여 서당 제각에 위패를 새겨 모시고 해마다 음력 3월 3일에 제향(시제)를 모셔 고인들을 뒤로하고 동리 발전을 축원해오던 서당터이다.
 
그 옛날 시끄럽고 버릇없고 선후도 모르고 위아래도 몰라 체면도 없고 염치도 없어 떠들어대던 학동들이 서당에서 모든 것을 배워 마을에서 희망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으니 동네의 모든 사람들이 가까운 곳에 서당을 지어 옮기자고 요청했다고 전하며
유행하던 풍수설이 들어와 동네의 위터에서 문인 선비가 생활을 지속해야 마을이 부자가 되고 귀인들이 계속 나와 마을 발전에 보탬이 된다는 말을 강조하면서 서당이 마을 위쪽으로 이사해올 것을 부추겼다고 하며, 뜻하지 않게 구서당옥사에 벼룩과 빈대가 번성하여 서당생이 학습하는 데 큰 어려움이 생겨서 옛 서당터를 버리고
새로운 서당터인 세등리 344번지로 서둘러 옮기도록 문암곽 선생(1859~1998)훈장 재직 시 (1890년경) 강하게 요청하여 구 서당터의 서당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진 것으로 전한다. 이 서당터는 대지는 넓으나 제각이 작아도 5인의 위패가 모셔지고 제각입구에 유암하선생비석이 있고 약 700평의 묘목 밭 입구에 문암선생(윤표)의 비 가 있고 약 800여평의 대지 위에 옛날의 서당옥사가 있었으나 철거되어 노지로 남아있다. 주요사항으로 서당훈장재직내력을 밝히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