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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게시판의 "해남 풋나락" 내용입니다.
제목 해남 풋나락
작성일 2020-06-19 14:38:39, 관리자 조회수 5 회
해남 풋나락
 
김정호
 
고종황제는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한 뒤 건달처럼 지내던 이하응의 아들로 왕위에 올랐다. 12세의 어린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그의 아버지는 흥선대원군의 지위에 올라 왕권강화를 위한 외척 세력과 권력투쟁을 벌인 인물이다. 흥선대원군은 인조(1595 ~ 1649, 재위기간 1623~49)의 아들 인평대군의 7세손이다.
인평대군의 아들 복선군(요)은 숙종(1674~1720) 6년 남인과 서인간의 전쟁에 휘말려 역모를 꾀했다는 죄목으로 남인계 허적, 허견등과 함께 참수를 당했다.
이 사건이 역사상의 경신대축출(1680)사건이다.
흥선대원군은 이때 살아남은 인평대군의 입양 후손이다. 인평대군의 세 아들과 손자는 모두 죽임을 당하고 세 아들중 복선군의 손자 이명석(1724~?)은 진도 귀양길에 올랐다. 당시 황산면 우항리 일대는 진도군수 관할 화원목장중 소를 방목하던 소목장이었다.
이 소목장이 뒷날 牧(목)자 대신 모가지 項(항)자를 써서 우항리가 되었다. 귀양길에 오른 이병석은 우항리가 진도 땅이라 했으므로 바다를 건너오지 않고 이 동네에 머물러 살았다. 그의 증손자 이재량(李載亮 1822~78)은 흥선대원군이 권세를 잡자 같은 인평대군의 후손임이 밝혀져 사면령이 내려졌다.
이재량의 아들 이환용(1873~1945)은 남평현감이 된 뒤 1903년 참관벼슬이 주어졌기 때문에 흔히 이 집안은 황산 이참판 집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집안은 역적누명에서 사면되면서 진도 조도면내 섬 중에서 개인소유가 아닌 모든 섬을 賜牌之地(사패지지)로 차지하게 되었다.
아직도 서거차도에는 이 집안 이름의 토지가 있지만, 수탈이 얼마나 가혹했던지 ‘이참판 검불 거둬 가듯’이란 일화가 전해온다.
동거차도, 진목도 등도 이참판 소유였는데 서거차도 논에서 나오는 벼는 7할을 가져가고도 부깨미 검불까지도 가져갔다고 해서 생긴 말이다.
이참판은 해남에도 많은 사패지를 받아 심한 수곡을 받아갔기 때문에 소작인들이 오기로 덜 익은 벼를 수확해주었다. 이 벼는 모두 목포에 있던 정미소로 보내졌는데 한결같게 해남 이참판집 나락은 익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래서 ‘해남 풋나락’이란 말이 생겼다.
맹골도 윤씨 땅값은 1936년에 십일시 금융조합 융자금을 받아 정리했고 거차도 일대 이참판 땅은 1942년에 대부분 사들였다.